8월 20~26일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북한 금강산관광지구에서 이뤄졌다. 2015년 10월 이후 2년 10개월 만이다. 8월 20~22일 열린 1차 상봉은 남측 이산가족 89명과 동반가족 108명 등 197명이 북측 가족 185명과 해후했다. 평생을 손꼽아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이들은 2박 3일의 일정 동안 여섯 차례 12시간 동안 만남을 허락받았다. 8월 24~26일 진행된 2차 상봉은 북측 이산가족 83명이 남쪽 가족들과 만났다. 이들은 울고 웃고를 반복했다.

▶ 이산가족 1차 상봉 첫째 날인 8월 20일 남측 이금섬(92) 씨가 아들 리상철(71) 씨를 만나 기뻐하고 있다. 이 씨는 피란길에 잃어버린 네 살배기 아들의 볼을 67년 만에 어루만졌다. ⓒ뉴시스
인사보다 눈물이 먼저 복받쳐 오른 이산가족들은 서로를 향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70년 만에 잡은 손을 놓칠세라 한시도 놓지 않았다. 떨어져 지낸 세월의 공백을 메우고자 질문을 멈추지도 않았다. 분단이 갈라놓은 기구한 운명 앞에서 가슴속 깊이 담아뒀던 이야기를 꺼냈다. 언제쯤 다시 볼까, 가족의 얼굴을 눈 속에 꽉꽉 담았다. 그러다가 이내 가족들은 준비한 사진을 꺼내놓고 하나하나 설명하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 같이 오지 못한 가족 등 이야기꽃을 피웠다. 70년 묵혀온 이야기를 나누기엔 찰나 같은 사흘이었다. 곳곳에서 “살아 있어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모든 가족의 사연이 드라마보다 진하고 묵직했다.
이금섬(92) 씨는 아들 리상철(71) 씨를 안고 울 수밖에 없었다. 아들도 그리웠던 어머니를 꼭 부여잡았다. 이 씨는 가족들과 함께 오른 피란길에서 남편, 네 살 된 아들과 헤어졌다. 그렇게 기약 없는 생이별이 시작됐다. 67년 만에 만난 아들의 얼굴에는 깊게 주름이 패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눈에는 여전히 헤어졌던 그날의 아이 같다. 이 씨는 쉴 새 없이 상철 씨의 볼을 부비고 손을 쓰다듬었다. 평생의 한을 풀듯 그동안 궁금했던 지난 세월을 아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어머니와 아들 모두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노인이 됐지만 모자는 서로의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어머니는 버스 차창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들도 손을 댔다. 모자 사이를 차가운 유리가 가로막았다.
70대 노인도 여전히 아이 같은 90대 노모
유관식(89) 씨에게 딸이 생겼다. 그런데 딸 나이가 67세다. 1950년 홀로 남쪽으로 피란할 때 아내의 뱃속에 있던 아이였다.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몰랐던 유 씨는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로 선정되면서 딸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는 상봉 장소로 떠나기 전 “이번 기회는 정말 기적이다. 내 생애 중 제일 기쁘다”고 감격해 했다. 아버지는 그 마음을 양갱으로 표현했다. 귀하고 좋은 것만 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딸에게 처음 건네는 간식이었다. 딸 유연옥(67) 씨는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유 씨는 만나고 싶었던 아내를 볼 수 없었지만 이미 세상 떠난 아내는 딸이라는 감동의 선물을 남겨놓았다.

▶ 1 남측 함성찬(93·오른쪽), 북측 동생 함동찬(79) 형제가 얼싸안은채 활짝 웃고 있다. ⓒ조선DB
2 북측에 두고 온 두 딸을 찾은 남측 한신자(99) 씨가 딸과 함께 가족사진을 보고 있다. ⓒ조선DB
3 북측 딸 안정순(70) 씨가 남측 아버지인 안종호(100) 씨 입에 음식을 넣어드리고 있다. ⓒ연합
4 8월 22일 작별상봉에서 한 가족이 가계도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

▶ 남측 유관식(89) 씨가 67년 만에 처음 존재를 알게 된 딸 연옥(67)씨와 사진을 찍고 있다. ⓒ뉴시스
“아이고~” 한신자(99) 씨는 북측의 딸 김경실(72)·경영(71) 씨를 보자 탄성부터 나왔다. 한 씨는 1·4후퇴 때 셋째 딸 경복(69) 씨만 데리고 남쪽으로 향했다. 두세 달이면 돌아갈 거라 믿었기에 세 살, 네 살의 두 딸을 친척집에 맡긴 것이다. 어머니는 죄인이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한 씨는 두 딸을 고아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다. 상봉 첫날 사진을 보며 쌓아온 이야기를 나눈 것이 몸에 무리가 갔는지, 한 씨는 둘째 날 단체상봉에는 참석하지 못하다가 상봉을 마치기 5분을 앞두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두 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마지막 날, 한 씨는 두 딸에게 “너희들이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걸 꼭 알아야 해”라며 수십 년간 시달렸던 죄책감을 벗어던지고 사랑을 표현했다.
이산가족 상봉의 최고령자는 백성규(101) 씨다. 백 씨는 북에 있는 가족을 위해 여름·겨울 옷, 내의, 신발 30켤레, 치약, 칫솔 등과 스테인리스 수저도 20벌 샀다. 만나고 싶던 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 밥 한 끼조차 함께할 수 없지만 북측에 있는 식구(食口)들을 위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막상 북측 며느리 김명순(71) 씨와 손녀 백영옥(48) 씨를 만나자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오히려 자신을 보고 오열하는 며느리와 손녀를 다독였다. 백 씨는 나중에야 “너무 좋아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고 전했다. 상봉 둘째 날에는 객실에서 오붓하게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진짜 ‘식구’가 됐다. 남북 가족이 분리된 공간에서 식사를 한 건 상봉이 진행된 2000년 이후 처음이었다.
7남매 중 북한에 있는 5남매가 모두 별세했다는 소식은 절망적이었지만 이관주(93) 씨는 고향 땅이라도 한 번 밟아보고 싶었다. 큰형의 자녀인 조카 리금순(71)·광필(61) 씨도 궁금했다. 그러나 동생 병주(90) 씨가 문제였다. 남쪽에 있는 두 형제가 모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지만 형만 선정됐기 때문이었다. 동반자는 1인이 가능했는데 노령의 이 씨를 보필할 아들이 동행할 계획이었다. 동생 병주 씨는 애가 닳았다. 자신도 이번에 조카들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도 노형제는 나란히 금강산 면회소를 찾았다. 조카들을 보자 켜켜이 묵혀왔던 그리움이 새어나왔다. 그래서인지 상봉 마지막 날 조카 광필 씨가 따라주는 대동강맥주가 유난히도 칼칼하게 느껴졌다. 삼촌과 조카는 ‘건배’를 외치며 훗날을 기약했다.
30년의 교직생활을 뒤로하고 퇴직한 김병오(88) 씨는 상봉이 결정되고 동생 순옥(81) 씨 생각에 단 하루도 잠을 편히 이루지 못했다. 동생이 어떻게 자랐을지,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면 날이 샜다. 북에서 만난 동생은 평양의대를 졸업하고 똑 부러진 의사가 됐다고 한다. 순옥 씨는 김 씨에게 “혈육은 어디 못 가. 오빠랑 나랑 정말 똑같이 생겼다”며 “통일돼서 단 1분이라도 같이 살다 죽자, 오빠”라고 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김혜자(75) 씨는 73년 만에 만난 동생 김은하(75) 씨를 향해 “사랑해”라고 말했다. 김 씨는 “내가 서울에서 ‘은하야!’ 하고 부를게”라고 하자 동생은 “그럼 제가 (북에서) ‘네’ 할게요”라고 농담을 나눴다. 시각장애 1급인 이금연(87) 씨도 북측 땅을 밟았다. 북에 있는 남동생이 모두 사망했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올케 고정희(77) 씨와 조카를 만나기 위해서다. 조카가 동생을 닮았는지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손끝에서 전해지는 가족의 진한 여운은 뜨겁게 다가왔다.
국군포로·납북자의 여섯 가족도 방북길에 올라 재북 가족을 만났다. 비록 당사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가족을 만나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자손의 얼굴에서 그리운 가족의 얼굴을 찾고자 하는 간절함 때문이었다. 정부는 2000년 제2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부터 국군포로와 납북자의 생사 확인을 북측에 의뢰했다. 지금까지 특수이산가족 350명의 생사 확인을 의뢰해 112명의 생사 여부를 확인했고 54명은 상봉에 성공했다. 이번 제21차 상봉에는 국군포로 1명, 납북자 5명 등 특수이산가족 6명의 가족이 재북 가족과 만남을 이뤘다.
“아들아, 너 아버지 있다”
전시 납북자 가족 최기호(83) 씨. 그의 어머니는 끼니마다 형이 먹을 밥을 떠서 상에 올리고 “밥공기에 물이 맺히면 네 형은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은 맞았다. 비록 형 영호 씨는 2002년 먼저 떠났지만 형은 이북에서 가정을 꾸리고 잘산 것 같았다. 형의 가족들이 내민 사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최 씨는 형의 사진 한 장 없던 터에 조카들이 건넨 사진을 받고 “보물이 생겼다”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조카라도 상봉이 이뤄져서 감개무량하다”고 했다.
이달영(82) 씨는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군인이던 아버지는 1952년 포로가 되어 북으로 가셨다. 아버지를 기다린 지 수십 년이 지나고 소식이 도착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대신 북에서 일영(48)·영희(48)라는 동생이 생겼다고. 그렇게 생면부지 두 사람은 이 씨의 혈육이 됐다. 처음 본 동생들과의 만남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화는 끊이질 않았다.

▶ 이산가족 1차 상봉 마지막인 8월 22일 돌아가는 버스에 오른 남측 가족들이 북측 가족들과 인사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
상봉 마지막 날, 금강산은 온통 눈물바다였다. 기약 없는 생이별의 비극이 다시 시작됐다. 가족을 다시 북에 두고 남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양경용(89) 씨는 조카들에게 남측의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줬다. 편지 한 통, 통화 한 번 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은 간절했다. 김춘식(80) 씨는 북측 여동생들을 보며 “오래 살아야 다시 만날 수 있어”라고 위로했다. 두 살 때 북에 남겨두고 온 아들을 만나면 “술 좋아하냐고 물어봐야지”라고 했던 이기순(91) 씨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과 술잔을 기울였다.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자 아버지는 아들을 꼭 안아줬다. 그러곤 말했다. “너 아버지 있다”고.
상시 상봉 등 이산가족 문제 담대한 해결 해야
문재인 대통령은 8월 20일 수석보좌관회의를 갖고 “정기적인 상봉행사는 물론 전면적 생사 확인, 화상 상봉, 상시 상봉, 서신 교환, 고향 방문 등 상봉 확대 방안을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부모가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 때 월남했던 이산가족으로 그 슬픔과 아픔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금도 상봉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애태우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가 남측에만 5만 6000명이 넘는다”며 “오래전에 남북 합의로 건설된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를 건설해 취지대로 상시 운영하고 상시 상봉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이산가족 문제의 담대한 해결을 강조했다.
선수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