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로맨스 영화에 목욕탕 콘셉트의 술집이 배경으로 등장한 적 있다. 영화에서는 스치듯 비쳤지만 이색적인 분위기가 꽤 인상적이었다. 어릴 적 너무나도 친숙했던 대중목욕탕을 마주한 반가움도 컸다. 목욕탕에 가기 귀찮다며 투정부리다가도, 목욕을 마치면 맛있는 초코우유를 사주겠다는 엄마의 달콤한 유혹에 따라나섰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목욕탕으로 향하던 횟수가 크게 줄었다. 집 주변 목욕탕도 다수 문을 닫았다.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대형 찜질방이나 사우나의 등장으로 동네 목욕탕의 입지가 좁아진 탓이다. 이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던 목욕탕 굴뚝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조금 아쉬울지 모르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외관은 지키되 또 다른 성격으로 우리 곁에 머무는 공간이 생겨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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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위치한 행화탕 전경 ⓒC영상미디어
대표적으로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 자리한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이 그런 존재다. 행화탕은 살구꽃을 뜻하는 한자어 ‘행화’와 ‘탕’을 합쳐 만든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과거에는 목욕탕이었다. 1950년대 말 지어진 뒤 60여 년 동안 목욕탕으로서 제 기능을 해오다 2011년 영업을 중단했다. 한때는 이 지역을 상징할 만큼 발길이 끊이지 않았지만, 대형 찜질방의 유행으로 찾는 사람이 크게 줄면서 문을 닫았다고 한다. 더군다나 아현동 일대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남겨진 건물마저 시한부 처지다. 고물상이나 창고, 사무실 등의 용도로 쓰이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아주 잠깐일 뿐, 오랫동안 유휴공간으로 방치됐다. 그러던 중 2016년 청년기획자들이 이곳에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예술로 목욕합니다’라는 구호 아래 바쁜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장소로 변모한 것.
‘목욕탕’이라고 적힌 높은 굴뚝도, 목욕탕을 뜻하는 기호도 옛날 그 시절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문을 열어젖히면 흡사 좌식 카페와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속담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닌데 간결하게 표현하려니 딱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로만 보면 카페지만 작은 소품 하나하나가 목욕탕을 연상시킨다. 우선 테이블 대신 널따란 책상과 방석,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놓여 있는데 과거 목욕탕에서 담소를 나누던 평상이 겹쳐 보인다. 판매 메뉴는 종이 대신 수건에 적혀 있으며 주문한 음식은 쟁반 대신 목욕탕 바가지에 담겨 나온다. 기존 공간의 특징과 추억도 함께 기억되길 바라는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서상혁 씨의 마음이 깃들었다.
“목욕탕에 가서 때를 벗기고 돌아가는 것처럼 이곳에 오는 분들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했습니다. 그 기반이 예술이 됐으면 하고요. 대중목욕탕은 같은 온도의 탕에 몸을 담근 채 사람들과 만남이 즐거운 곳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행화탕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해방과 치유의 예술 약수가 샘솟는 공간이에요.”
“행화탕을 매개로 서로를 기억했으면”
서상혁 씨는 일부러 좌식 형태를 고수한다. 방문객들이 매일 사용하는 스마트폰, 노트북 등에서 벗어나 대화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흔히 일상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무언가를 다시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행화탕에 들렀던 사람들이 그랬으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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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뉴판과 쟁반을 수건과 목욕 바가지가 대신하고 있다.
2 행화탕은 좌식 형태를 고수함으로써 방문객이 대화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C영상미디어
그래서일까. 매표소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위치를 따라 탕이 자리했던 공간으로 움직이다 마주한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탕에 들어오기 전 당신이 서 있는 탈의실에서 신발을 벗고 바쁜 일상의 짐도, 내 것이 아닌 것도 오롯이 내려놓고… 마음의 때를 밀고 가기를.’
복합문화예술공간답게 행화탕의 모든 공간은 전시와 공연을 위한 장으로 활용된다. 탈의실과 욕탕은 당연하고 야외마당, 마당창고, 보일러실, 과거 목욕탕 주인이 살았던 집까지 각 공간의 특성을 살려 예술활동을 펼칠 수 있다.
이를테면 기름창고였던 곳의 천장에는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는데 그 사이로 떨어지는 빛기둥이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낸다. 시간과 날씨의 변화에 따라 공간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덕분에 이곳을 찾는 아티스트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이라고. 탕과 좁은 문으로 연결된 어두침침한 보일러실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낭만적 분위기로 가득하다. 또 목욕탕 내부 벽면을 장식했던 사각타일, 시간이 지나 낡아버린 지붕널은 무대의 색다른 배경이다.
행화탕은 아현동 재개발 예정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언제든 철거 일정이 정해지면 사라지게 된다. 굵고 강렬한 예술활동을 빠르게 지속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행화탕에서의 활동은 언젠가 그 끝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행화탕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곳에서 이뤄지는 활동이 매일 가치를 더할 수 있도록 해야죠.”
서상혁 씨는 행화탕을 알리기 위해 그 흔한 온라인 홍보도 하지 않는다. 행화탕이 지향하는, 방문객에게 권하는 공간의 의미를 사진 한 장으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다. 온라인을 통해 엿보기보다 직접 이곳에 와서 걷고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행화가 살구꽃이에요. ‘고향의 봄’ 가사 중에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고 있잖아요. 향토적인 정서가 물씬 느껴져요. 행화탕도 그랬으면 해요. 행화탕과 이곳의 예술활동을 매개로 사람들이 서로를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조만간 살구를 사서 인근 주민들과 함께 청을 담그는 작업도 해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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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화탕에서 열린 예술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축제행성
2 과거 탕이 존재했던 공간 앞에 위치한 안내판 ⓒC영상미디어
3 지난 세월의 흔적이 벽면과 천장을 통해 전해진다. ⓒC영상미디어
4 중앙탕 옛 모습을 고수한 플래그십 스토어 배스하우스의 모습 ⓒ조선뉴스프레스
남겨진 것과 새로운 것의 공존
유유히 걷는 한가로움이 매력인 서울 종로구 계동길에도 동네 목욕탕이 있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중앙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골목을 계동길이라고 하며, 그 길 한편에 ‘중앙탕’이 5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중앙탕은 더 이상 목욕탕이 아닌 아이웨어 브랜드(Gentle Monster, 젠틀몬스터)의 플래그십 스토어, ‘BATHHOUSE’다.
소박한 목욕탕과 화려한 쇼룸의 조화가 어딘가 어색하기도 하지만, 이곳만이 줄 수 있는 신선함이 달갑다. 젠틀몬스터는 남겨진 것과 새로운 것의 공존을 연출했다. 목욕탕의 고유성을 살리면서도 브랜드의 정서를 담아 ‘창조된 보존’의 개념을 재현하고자 했다. 옛 목욕탕 간판을 달고 있지만 건물 안에는 최신 유행의 안경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수많은 사람이 몸을 담갔을 탕의 구조는 그대로이며, 파란색 낡은 타일 위로 제품 진열대가 쭉 늘어서 있다. 물을 데우는 보일러도 예전 모습 그대로 인테리어에 활용해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층에는 물의 동력을 통해 에너지를 생성하는 설치 작품이 설치됐는데 이 또한 작은 탕 구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변환시키고 이것은 바로 위층에 설치된 162개 전구를 밝힌다. 목욕탕의 동력원인 물을 적용한 흥미로운 볼거리다. 3층으로 향하는 계단 중간에는 중앙탕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현재 모습과 과거 모습을 비교하며 감상하는 재미는 덤이다.
이 밖에도 경북 경주시 좁은 골목을 지키던 목욕탕 ‘온정탕’은 술집으로 변했다. 철제문에 적힌 ‘여탕’, ‘남탕’ 문구는 과거 이곳이 어떤 장소였는지를 알려준다. 수십 년은 됐을 것 같은 누런 종이와 벽지 대신 붙여둔 수건, 지금은 테이블을 품고 있는 탕 등 지난 흔적을 찾으며 추억에 젖어본다.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