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산동 주택가에 위치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이곳은 일반 상식을 뒤엎는 획기적인 곳이다. 우선 장소부터 그렇다. 타 박물관들과 다르게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다. 김동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장은 “박물관이 건립까지 많은 고비를 넘어야 했다”고 고백한다. 처음 박물관 부지로 확정된 곳은 서대문 독립공원 내 매점 부지였다. 하지만 독립유공자 단체에서 “서대문 독립공원 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물관 건립은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 무산되었다. 김 관장은 “할머니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시각을 느끼고 마음 아파하셨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의미 있는 수확도 있었다. 반대집회 소식을 들은 일본 시민들이 개별 후원에서 조직적으로 일본후원회를 발족하고 1억여 원의 모금을 전달해온 것이다. 그 인연이 이어져 박물관 개막식에도 50명의 일본인들이 참석하기도 했다. 주택가에 자리 잡으며 훈훈한 미담도 있었다. 박물관 뒤 다세대 주택에서 “낮 시간의 주차 공간을 박물관 관람객들이 이용해도 좋다”고 주민회의 결과를 알려온 것이다.

▶ 소녀상 뒤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발자취가 신문과 영상, 판결문 등의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C영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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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층의 검은 벽면에는 박물관 건립의 주춧돌이 된 후원자들의 명단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C영상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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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세종고 학생들이 ‘나비기금’의 토대를 만든 김복동, 길원옥 할머님의 동상과 함께하고 있다. ⓒC영상미디어
“성미산마을의 품에 안긴 기분이었어요. 가족을 갖지 못한 할머니들을 마을 주민들이 따뜻하게 품어준 느낌도 들었고요.”(김동희 관장)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전쟁 중 유린당한 여성 인권을 이야기하는 최초의 박물관이다. 주택을 개조해 거창하고 위압적인 느낌 없이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펼쳐놓기에 적절한 공간이 됐다. 좁은 면적 탓에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는 없지만, 좁다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전시 구성이 탄탄하고 호소력 있다. 피해 할머니들에게 오롯이 집중하고 공감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공간이다. 특별전시를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애관, 운동사관 등을 모두 둘러보려면 최소한 한 시간의 여유를 갖고 방문하는 게 좋다.
좁은 공간에 담긴 할머니들의 아픔

▶ 검은 실루엣의 소녀 그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과거를 상징한다.(왼쪽) 2층 추모관에는 검은 벽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영정 사진이 새겨져 있다. 벽돌 사이의 꽃은 관람객이 헌화한 것이다.(오른쪽)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상식을 뒤엎는 파격은 입구에서도 계속된다. 입구는 숨겨놓은 것처럼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위치하고 있는데, 육중한 검은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관람객을 다시 건물 밖으로 이끈다. 전시가 지하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층별 관람과 달라 다소 혼란스러운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혼란스러움도 의도된 기획에 가깝다. 감정이입을 위해 건축 기법과 동선 구성을 활용한 것이다. 이것은 할머니들이 겪어야 했던 세상과의 단절, 역사의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장치다. 행선지도 모른 채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간 소녀들의 참혹한 감정과 경험을 전하려는 시도다. 피해자 할머니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것에 집중하려는 설계와 전시 구성이 돋보인다.
맞은편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나가면 잘게 부순 돌을 깔아 만든 쇄석길이 나온다. 바닥의 돌 때문에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소리가 크게 들리는데 스피커에서 나오는 행군하는 군인들의 군홧발 소리와 뒤섞여 불안한 마음이 커진다. 높은 벽 왼쪽에는 검은 실루엣의 소녀가 그려져 있고 소녀의 안에는 꽃나무가 있다. 꽃 같은 나이에 희생당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황을 하나의 그림으로 요약한 것이다. 그래서 소녀의 실루엣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진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보면 실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얼굴을 그대로 본뜬 부조 형상이 있다. 할머니들이 과거와 현재를 마주 보게 하면서 비극이 더 극대화되는 느낌이다. 고난의 세월이 얼굴의 주름으로 그대로 남아 보는 이들을 가슴 아프게 한다. 꽃 같은 시절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에.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낮은 천장의 좁고 어두운 골방이 나온다. ‘그녀의 일생’이라 이름 붙은 이 공간은 전쟁터와 위안소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나무 아래서 입만 벌리고 있으면 과일이 떨어지는 곳”이라는 꼬임에 빠져 오키나와 위안소로 끌려간 배봉기 할머니의 육성과 영상이 재생되어 위안부 문제가 살아 있는 진실임을 알게 한다. 지하에서 나오면 곧바로 2층으로 이어지는데 계단 벽을 둘러싸고 있는 거친 느낌의 벽돌에는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이 아로새겨져 있다. “그놈들 한 걸 생각하면 보상이라는 것으로도 한이 안 풀린다”,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다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라는 증언이 사진과 함께 계단을 따라 배열되어 있다. 할머니들의 호소는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점차 희망의 소리로 변해간다. 할머니들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아픔 속에서 피는 꽃처럼 처연하고 묵직한 울림이 있다.
침묵 속에 가려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실제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너희가 없다고 했지. 그런데 내가 이렇게 살고 있어. 엄연히 산 증인이 있는데 없다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성노예제 범죄의 가해국인 일본정부를 향해 외쳤던 김학순 할머니의 목소리는 2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쟁쟁하게 울린다. 그 당당한 목소리가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할머니의 용기가 침묵하고 있던 수많은 생존자에게 목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이것은 분단을 넘어 북으로, 바다를 건너 필리핀, 중국,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으로 건너가 일본군 성노예제 생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당당하게 증언하는 목소리를 찾게 해주었다. 실제로 김 할머니의 증언으로 세계 각국에 퍼져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말문을 열고 당시 참상과 잔혹한 인권유린 사례들을 밝히는 계기가 됐다.
김동희 관장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 당시에도 반발은 심각했다. ‘창피한 거 모르는 노인네’라고 비난받고, 가족·공동체와 분리돼 낙인찍히기도 했다. 김 할머니가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구나’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피해자의 용기 있는 증언과 가부장적인 사회에 의미 있는 균열을 내는 결과 덕에 김 할머니의 발언을 ‘미투’ 운동의 시조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 사회는 용기 있는 행동을 기억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인권을 증진하기 위해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일인 8월 14일을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올해 벌써 6회 기림일을 맞이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전쟁 속의 여성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행동한다. 박제된 역사로 머물지 않는 곳이다. 때문에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을 접할 때도 있다. 한번은 어느 외국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전시를 관람하기에 사연을 물어보니 딸이 성폭력을 당했고, 그 이후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관람객은 “내 딸이 이곳에 와서 이런 전시를 봤다면 자살을 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라는 말을 남겼다. 김동희 관장은 그 말이 계속 가슴에 남는다고 말했다.
“세상에서는 여전히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게 돼요.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먼저 증언을 하신 할머니들의 역사를 좀 더 일찍 알았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위안부 피해자 넘어 모든 여성 인권을 말하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의 가장 큰 목표는 미래세대에 올바른 역사의식을 계승하는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지속적인 역사교육은 할머니들의 꿈이기도 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의 개관일이 어린이날인 5월 5일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전쟁과 여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라나는 미래세대에 대한 올바른 역사 교육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있다. 김동희 관장은 인식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한번은 초등학교 아이들이 박물관에서 교육을 듣는데 어떤 친구가 ‘할머니들 정말 끈질겨요!’라고 외쳤어요. 예전에는 불쌍한 피해자의 시선만을 받았지만, 이제는 아이들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용기 있고 당당한 여성인권운동가라고 인지하는 것 같아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을 이야기하면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를 빼놓을 수 없다. 박물관 건립은 정대협의 활동 중 하나였다. 최근에는 정대협이 미래세대를 위한 연대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이하 정의연)와 통합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정의연’으로의 통합은 하나의 주제를 두고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를 강화한다는 의미도 있다. 여성단체 중심이던 ‘정대협’이 아니라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나아가 전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시민사회단체와 더 넓고 더 깊게 연대해 문제 해결의 끝장을 보겠다는 취지다. 그렇게 해서 미래세대의 운동 기반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정대협’의 이름을 바꾸기 위한 시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정신대’와 ‘위안부’라는 용어가 다르다는 연구가 나오면서 명칭 변경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체로 인식됐기 때문에 중요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판결내리고 박물관 건립하면 해산해야 하는데 뭐 하러 이름을 바꾸느냐’는 분위기였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대표는 역설적으로 2015 한일합의가 통합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우리 세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미래세대에도 이어져서 계승해야 하는 운동이구나. 과거 역사를 기억하는 차원을 넘어서, 미래세대가 운동을 계승하고 이어가야 한다”며 “역사의 산증인이라는 생존자가 사망하면 운동도 끝나는가? 아니다, 미래세대에 기억되고 계승된다는 것은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재발 방지 결의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긍정적인 신호는 이미 감지되고 있다. 최근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지지하는 주체가 10~20대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젊은이들이 있는 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들의 허스토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미래를 바라본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 인권으로 접근해야”

윤미향 정의기억연대대표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생존자 수는?
현재 28명이 생존해 계신다. 최근에 새로 신고한 분이 계셔서 한 명 늘어난 수다.
‘위안부’ 피해 인원은 몇인가?
대략 2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직접 작성한 문서와 회의록에 일본 군부가 군인 29~35명당 한 명의 여성을 배당하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사병 수에 피해자를 산출한 것이다. 하지만 전시 강간 피해는 집계조차 되지 않아 피해자의 규모는 확답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정대협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데 활동의 계기가 있나?
처음 사회활동을 시작한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은 민주화의 격동기였다. 한국 사회 변화에 한 역할을 맡으면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이 기생관광이었다. 당시 국익과 경제라는 명분으로 여성의 몸이 상품화되고 정책적으로 조장되는 현실에 화도 나고 부끄러웠다. 그런 과정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을 만나게 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다가 정대협 간사로 참여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정대협에서 요구하는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은 무엇인가?
우리가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일곱 가지로 ‘전쟁범죄 인정 / 진상규명 / 공식사죄 / 법적 배상 / 역사 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책임자 처벌’이다. 두 가지로 나누면 사실 인정과 책임 인정이다. 인정한 뒤에 사죄하고 배상하고 역사 교육의 후속조치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사실 인정부터 안 되니까 막히는 것이다.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는 돈은 불명예이다.
28년 동안 활동했는데 과거와 달라졌다고 느끼는 것이 있나?
피해자들의 인권과 명예가 많이 회복됐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피해자들을 부끄러운 존재로 인식하고 억압했다. 하지만 이제는 가해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인식이 잡혔다. 피해자들이 존엄한 존재로 자리매김했고, 한국 사회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지금 일본군 ‘위안부’ 피해 관련 해결 운동의 주 참여자가 중·고등학생 청소년들이라는 것이다. 미래세대의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어 감사하고 뿌듯한 마음이다.
활동의 어려움을 느낄 때는?
피해자의 인권 문제가 국익의 걸림돌로 취급될 때 가장 어렵고 힘들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는 국익이나 경제와 거래하거나 교환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으로도 맞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국가와 국가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피해를 입게 되는 부분이 없었으면 좋겠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관람 및 후원 정보
주소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11길 20
시간 오전 11시~오후 6시까지(휴관: 일·월요일)
요금 일반 3000원/청소년 2000원
문의 02-392-5252
후원 국민은행 069101-04-194282
강보라│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