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애(91) 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마를 법도 한데 동생 창호 씨 이야기에 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씨는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에 선정돼 67년 만에 동생 소식을 알게 됐다. 단, 2017년 9월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였다. 이 씨는 “이제 만날 수 있게 됐는데, 1년만 더 살지”라고 계속 되뇌었다. 그러면서 동생과의 추억을 꺼내놓았다.
“가운데 엄마가 눕고 양옆에 저와 창호가 누워서 나란히 잤어요. 저는 맏딸이니 엄마한테 제 방향으로 누우라고 했고, 창호는 이 집안의 가장은 자기니까 자기를 보고 누우라고 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이리 누었다 저리 누었다 하셨죠. 결국 ‘이러다 밤새 못 자겠다’며 천장을 보고 우리 손을 살포시 잡아주시곤 했는데 그러면 우린 스르르 잠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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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춘애 씨가 북에 있는 가족에게 보여줄 사진을 정리하고 있다. ⓒC영상미디어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
이 씨의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시(김책시)다. 소학교 바로 위쪽에 고모가 살고 골목을 따라 쭉 올라가면 벽돌공장과 중학교가 있었다. 고향집은 그 옆이었다. 이 씨가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스물여섯 엄마는 홀로 두 아이를 길러야 했다. 엄마는 장사로 생계를 이어갔고 동생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려 노력했다. 이 씨가 학교를 졸업하고 첫 월급봉투를 건넸을 때, 엄마는 남편에게 받는 월급봉투 같다며 봉투를 놓지 않았다. 세 식구는 단란했다.
스물두 살 시집을 갔다. 단꿈도 잠시, 이듬해 전쟁이 발발했고 마을이 온통 난리였다. 지독히도 추운 겨울날, 그의 시부모님은 피란을 결정했다. 전쟁을 피해 딱 두 달만 부산에 가 있자고 했다. 갑작스런 피란길에 이 씨는 손가방 하나만 덜렁 들고 나왔다. 어렵게 친정에 기별을 넣었고 동생 창호가 곧 따라갈 테니 먼저 떠나라고 했다. 이 씨는 시댁 식구들과 미군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도착한 곳은 거제도. 일행은 부단히 거처를 옮겼고 결국 부산 남구 우암동에 터를 잡았다.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은 이 씨처럼 멀리 가지 못했다. 다시 고향으로 떠날 날을 그리며 부산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이 씨는 틈틈이 동생 창호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일대 피란촌을 다니던 어느 날, 동생 친구를 만나 소식을 들었다. 동생이 “어머니를 홀로 두고 올 수 없다”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았다. 그래도 동생 찾길 멈추지 않았다. 행여 교복을 입은 또래가 보이면 ‘혹시나’ 하며 다가가기 일쑤였다.
후회가 가득했다. 이 씨는 마치 엄마와 동생을 버리고 온 것 같아 자책했다. 결혼을 일찍 해 엄마와 동생과 헤어진 것 같았다. ‘왜 결혼을 빨리 했을까, 엄마 곁에 좀 더 있을걸.’ 꿈속에서 엄마는 대문 앞에서 밤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고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 봤던 엄마의 모습과 같았다. 시간이 흐르며 엄마·동생을 생각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점점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불쑥 그리움이 밀려왔다. 명절이면 유독 생각이 나 가슴이 시렸다. 가족이 도란도란 모이면 북쪽의 가족은 잘 있는지 걱정됐다. 이 씨에게는 남편과 아들들이 있었지만 행복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마음속 깊이 이는 헛헛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스물셋 새댁은 아흔하나 할머니가 됐다. 이제 가족과 재회하는 일은 단념했다. 그사이 우암동 일대의 피란민 1세대도 거의 유명을 달리했다.
“즐겁게 살았단 말 들어야 70년 한 풀릴 것”
어느 날 전화벨이 울렸다. 대한적십자사였다. 이산가족 상봉 후보 명단에 이 씨의 이름이 들어갔다는 것. 손이 덜덜 떨렸다. 지난 세월의 기억이 거짓말처럼 스쳐갔다. 바로 아들에게 알렸다. 아들 역시 이 사실을 믿지 못하고 대한적십자사에 전화를 걸어 재차 확인했다. 생시였다. ‘이제 창호를 만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며칠 뒤 회보서가 왔다. 창호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고, 대신 창호의 딸을 만나겠느냐고 했다.
“동생이 살아 있을 거라 믿었어요.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엄마는 아버지 곁에 모셨는지, 고향집은 그대로 있는지, 묻고 싶은 말이 참 많았는데…. 1년만 더 살아줬으면 만날 수 있었는데.”
이 씨는 설렘과 아쉬움이 교차했다. 이제라도 동생의 소식을 알게 된 데 위안을 삼았다. 대신 창호의 딸을 만나 물어보기로 했다. 이남으로 피란오던 해 찍은 사진, 팔순 잔치에 가족 모두가 찍은 사진, 이북에서 온 친척 오빠 사진을 보여주기 위해 인화했다.
선물이 그의 마음을 대변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선 금반지라도 하나씩 주고 싶은데 반입 물품이 제한돼 있고 가방도 턱없이 작다. 대신 몸에 맞을지도 모를 옷을 사고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게 내의도 준비했다. 의약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에 진통제도 잔뜩 구매했다. 이 씨는 “뭐든 해주고 싶은데 정작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조카가 창호를 닮았다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어요. 사진 한 장 없지만 지금도 창호 얼굴이 생생하거든요.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못난 딸·누나 생각일랑 잊고 엄마와 동생이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아들딸 손주 재롱에 즐겁게 지내셨다고. 그래야 가슴속 맺힌 한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네요.”
이 씨는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상봉장에 들어서기로 했다. 이날 아들이 동행해 휠체어를 끌고 가방을 챙기기로 했다. 아들도 벌써 예순다섯 살이다. 곪을 대로 곪은 91세 어머니의 오래된 응어리를 풀기 위해 이 씨 모자는 금강산으로 향한다.
2000년 남북 상봉 본격 시작, 현재 생존자 5만 명
1983년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총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됐기 때문이다. 당초 3시간 예정이던 방송은 예상을 뛰어넘는 반응을 보이며 대기록을 낳았다. 시청률 78%를 기록하며 KBS 여의도 일대는 장사진을 이뤘고 가족을 찾는 접수가 10만 건을 넘었다.
이를 계기로 헤어진 가족을 찾는 관심이 뜨거워졌다. 그 영향은 단연 남북으로 확대됐다. 남북의 첫 이산가족 상봉 시초는 1985년 9월 고향 방문단이라 할 수 있다. 1984년 남한에 발생한 수해에 북한이 구호물자 제공을 제의했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 논의도 덩달아 급물살을 탔다. 당시 서울과 평양을 오간 방문단 157명이 생사 확인을 했고 이 중 65명이 가족을 만났다.
본격적인 상봉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이뤄졌다. 양 정상이 이산가족 상봉에 합의하며 그해 8월 15일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됐다. 이번 제21차 상봉은 2015년 10월 개최된 제20차 상봉 이후 2년 10개월 만이다. 2005년부터는 화상 상봉도 이뤄졌으나 2007년 11월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상태다.
이산가족 신청자 총 13만 2603명, 생존자는 5만 6862명에 지나지 않는다. 상봉 사업이 처음 시작된 후 절반 이상이 타계했다. 지금도 매년 3000명 이상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들이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선수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