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시리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추운 날씨다. 코끝을 스치는 칼바람이 매섭고 목구멍으로 훅 들어온 공기는 차디차다. 그런데 묘하다. 때론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무언가를 말끔히 비워내는 듯 청량한 느낌에 찬바람을 좇게 된다. 눈이 뿜어내는 형언할 수 없는 새하얀 기운에 젖어든다. 겨울이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했을 정취다. 이 겨울이 가기 전 그 정취 가득한 곳으로 안내한다.

▶ 상고대가 피어있는 강원 태백산 나뭇가지 사이로 등산객들이 움직이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단풍이 만들어낸 오색 향연이 가을 산의 매력이라면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은빛 장관은 겨울 산의 묘미다. 그중에서도 덕유산은 설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매년 이맘때면 눈꽃이 빚어낸 절경을 찾아 몰려든 인파가 그 인기를 증명한다.
덕유산은 전북 무주와 장수, 경남 거창과 함양군 등 2개도 4개 군에 걸쳐 솟아 있다. 이름 그대로 덕이 많은 너그러운 산이다. 임진왜란 때 산속에 숨은 우리 백성을 왜군의 공격으로부터 구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면서 ‘광여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이름이 됐다. 과거 백성의 목숨을 지켜준 덕유산은 이제 그곳을 찾는 사람에게 절경을 선물하며 여전한 너그러움을 자랑한다.
겨우내 덕유산에는 상고대가 피어 있다. 상고대는 밤새 내린 서리가 나무에 얼어붙어 만들어진 것을 가리킨다. 얼핏 눈꽃과 비슷해 보이지만 눈꽃은 나무에 얹힌 눈 무더기다. 아름다움으로 따지자면 굳이 상고대와 눈꽃을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지만, 상고대는 아무 곳에서나 쉬이 볼 수 없다. 영하 6도 이하, 습도 90% 이상의 온도차가 심한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주로 나타난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속 엘사 공주가 손을 뻗자 순식간에 곳곳이 얼어붙던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덕유산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높은(1614m) 산이다. 정상인 향적봉을 향해 부단히 걷는다 해도 쉽지 않은 길이다. 겨울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남녀노소 누구나 덕유산에 오를 수 있는 건 곤돌라가 있어서다. 무주 덕유산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15분이 흐르면 설천봉(1525m)에 이른다. 여기서 20분 정도 걸으면 향적봉에 닿는다. 곤돌라 아래 펼쳐진 순백의 눈꽃 세상은 백미다. 바람이 불면 얕게 쌓인 눈이 흩날려 앙상한 나뭇가지가 모습을 드러내며 시린 겨울임을 알린다.
곤돌라를 타고 올랐다면 하산은 설경과 함께 도보로 할 것을 추천한다. 향적봉에서 구천동 계곡을 따라 백련사 방향으로 하산하며 눈에 담는 세상은 또 다른 풍경이다. 백련사는 구천동 계곡에 있던 14개 사찰 중 유일하게 남은 곳이다. 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구천동에 은거했는데 그가 머무른 자리에 하얀 연꽃이 피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지은 절이 백련사다. 설경과 곁들이는 사찰의 고즈넉함이 하산 길의 추억이 될 것이다.
천제단에서 바라보는 눈 덮인 태백산
새해가 시작되면 꼭 한 번은 태백에 가봐야 한다고 누군가 이야기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아마도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영산, 태백산 때문이 아니었을까. 태백산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정기가 흐르는 곳이라고들 입을 모은다. 새해를 맞아 무사와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오르는 사람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태백산 정상에는 과거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천제단이 있는데, 천제단에서 바라보는 눈 덮인 태백산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눈꽃이 펼쳐진 주목군락지는 중후한 웅장함마저 자아낸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탐방길은 유일사 코스다. 주차장에서 시작해 유일사까지 1시간, 유일사에서 천제단까지 1시간이 소요된다. 암벽이 비교적 적고 경사가 완만해 산행에 큰 무리는 없다. 겨울에는 차량이 통행할 수 없기 때문에 오가는 차에 길을 비켜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는 것은 덤이다. 태백산의 대표 산봉우리를 모두 탐방하고 싶은 경우 문수봉 코스로 향하면 된다. 주의할 점은 탐방로 대부분이 돌로 이루어졌고 중간 중간 물길이 지나 다소 미끄러울 수 있다.
국내 겨울 축제로 대표되는 ‘태백산 눈축제’도 태백산을 눈꽃 여행지로 꼽는 이유다. 눈축제는 매년 1월 중순 즈음 막이 오른다. 올해는 19일부터 2월 11일까지 태백시와 태백시축제위원회 주최로 25번째 눈축제가 열린다. 종전 10일간 진행돼오던 축제 기간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맞아 24일간으로 2배 이상 늘었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눈꽃열차를 타고 축제 장면을 사진으로도 남겨보자. 굽이진 협곡을 지나며 백두대간의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정읍 내장산의 한겨울 설경도 압권이다. 노산 이은상은 시 ‘내장산’에서 “내장산 골짜구니 돌벼래 위에/ 불타는 가을 단풍 자랑 말아라./ 신선봉 등 너머 눈 퍼붓는 날/ 비자림 푸른 숲이 더욱 좋더구나”라고 했다. 가을 단풍보다 겨울 풍광이 더 아름답다고 찬탄하는 그의 시구가 어색할지도 모른다. 내장산은 유독 단풍으로 유명한 탓에 눈 덮인 모습을 떠올리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녀가면 알겠지만 겨울 내장산의 정취는 호젓함 이상이다. 새하얗게 변해버린 고봉과 어우러진 고찰 내장사는 한 폭의 동양화가 따로 없다.
내장산은 호남 5대 명산 중 한 곳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8경 중 하나다. 주봉인 신선봉을 비롯해 봉우리들의 높이가 700m 내외지만 봉우리 정상이 저마다 독특한 기암으로 이뤄져 예로부터 ‘호남의 금강’이라 불렸다. 원래 본사(本寺)인 영은사의 이름을 따서 영은산으로 불리다가 산 안에 감춰진 것이 무궁무진하다고 해 안 내(內), 감출 장(藏) 자의 내장산으로 명명됐다.
내장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탐방안내소를 출발점으로 서래봉, 불출봉을 지나 탐방안내소로 내려오는 구간이다. 소요 시간은 4시간 남짓. 서래봉은 최고봉이 아니지만 가장 경치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봉우리다. 약 1km 너비로 펼쳐진 바위 절벽에 오르면 내장산 봉우리들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서다. 다만 서래봉에서 서래삼거리 가는 길에 위치한 철계단은 길고 경사가 가팔라 주의가 필요하다. 거친 숨 고르기가 싫다면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오르는 방법도 좋다. 다소 인적이 드문 겨울에는 대기 시간도 길지 않다.
내장산 초입에 즐비한 식당 중 골라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로 산채정식이 메인 메뉴인데 20여 가지의 다채로운 반찬에 젓가락질이 분주해진다. 내장산 입구부터 정읍 시내까지 차량으로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타지에서 온 탐방객이라면 시내 구경도 나쁘지 않다.
구름에 가려진 하얀 세상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두터운 눈꽃으로 덮인 해발고도 1668m의 한라산 윗세오름이다. 자욱한 구름이 휘감아 흡사 산신령이 나올 법한 광경이다.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면 상고대까지 더해져 겨울 산 특유의 분위기를 한껏 풍긴다.

▶ 제주 한라산 영실 코스를 찾은 탐방객들이 눈꽃이 활짝 핀 탐방로를 걷고 있다. ⓒ연합
한라산 등산로는 어리목탐방로와 영실탐방로, 성판악탐방로, 관음사탐방로 등이 있는데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구간은 어리목탐방로다. 한라산국립공원 탐방안내소에서 시작해 어리목계곡, 사제비동산, 만세동산, 윗세오름 대피소, 남벽순환로를 거쳐 남벽분기점까지 이어지는 코스로 편도 3시간가량 걸린다. 경사가 가파른 사제비동산 구간은 튼튼한 체력이 요구되지만 만세동산에서 남벽분기점까지는 완만한 지형이니 겁낼 필요 없다. 운이 좋다면 코앞에서 노루를 마주칠 수도 있다. 그러나 겨울철 한라산은 ‘오를수록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기상 변화가 심하다. 때문에 기상정보를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위험요소에 대비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춰야 한다.

▶ 전북 남원 ‘지리산 바래봉 눈꽃축제’에서 빙벽 타기에 도전하는 동호인들 ⓒ연합
겨울맞이 눈꽃축제
태백산 눈축제
일시 1월 19일~2월 11일 장소 강원 태백시 천제단길 168
대관령 눈꽃축제
일시 2월 7일~2월 22일 장소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대관령로 135-6
지리산 남원 바래봉 눈꽃축제
일시 2월 11일까지 장소 전북 남원시 운봉읍 바래봉길 214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