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편지 쓰기도 좋지만 걷기도 좋다. 숲속을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내 마음에 새겨지는 또 다른 편지가 된다. 무성했던 초록을 등지고 수줍게 발그레해지는 잎들을 보며 이 계절의 깊이를 느껴본다. 깊은 숲을 간직한 울진으로, 깊은 내 마음으로 가는 길이다.
울진 하면 떠오르는 것, 청정한 바다와 대게, 불영사계곡과 불영사도 있지만 무엇보다 금강송을 빼놓을 수 없다. 금강산에서 시작해 강원도를 거쳐 경북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에 자리 잡은 울진 금강송 숲으로 가자.
금강석처럼 곧고 붉은 속살을 지녀 금강송이라 불리는 이 크고 곧은 소나무는 땅 위에 꼿꼿이 서 있는 모습도 늠름하지만 죽어서도 최고의 목재로 쓰이는 비범함을 보인다. 궁궐을 짓거나 관을 짜는 특별한 용도로 사용됐던 금강송에는 베어내기에는 아까운 남다른 기개가 흐른다. 우리나라 최대의 금강송 군락지가 있는 울진 소광리 일대에는 200년 이상의 소나무만 8만 그루가 들어차 있다.
걸으며 마시는 가을 숲의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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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소나무 숲길 깊은 곳에서 초록과 빨강이 교차되는 가을의 길목과 마주한다.
금강송 곁에는 금강소나무 숲길이라 이름 붙은 트레킹 코스도 여럿이다. 현지인에게는 ‘십이령바지게길’이라고도 불리는 이 길은 상인들이 지게를 짊어지고 열두 고개를 넘어야 봉화에 닿을 수 있는 길이라 해서 십이령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동해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을 비롯해 죽변항에서 수확하는 고등어와 미역 등의 해산물이 이 길을 통해 봉화와 영주, 안동 등의 내륙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자연을 벗 삼아, 재미 삼아 건강으로 걷는 이 고갯길이 예전에는 생계를 위해 넘어야만 하는 험난한 고갯길이었다.
이번 트레킹의 주인공은 금강송 군락지가 아닌 십이령고갯길이다.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금강송 군락지 말고 그 옆으로 또는 그 뒤로 수줍게 난 생활 속 숲길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잡목이 너울을 이루는,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울창한 숲길로 들어선다. 무명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네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하고 포근한 금강소나무 숲길 4구간이다.
금강소나무 숲길은 총 다섯 개 구간이 있다. 1구간은 십이령바지게길의 시작인 두천리에서 시작하고, 2구간은 소광리에서 광회리로 넘어가며, 3구간은 소광리에서 통고산휴양림으로 뻗어간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인 4구간은 소광2리에서 조령 성황당을 거쳐 대왕소나무를 돌아 나오는 숲길이다. 2016년에 개방된 덕에 사람들의 발길이 덜해 원시림과 같은 울창한 숲을 만날 수 있다. 소나무 사이사이 잡목과 계곡이 어우러져 아늑한 숲을 이루고 있다.
4구간에서 꼭 거쳐 가야 할 곳은 대왕소나무가 있는 언저리다. 대왕소나무의 600년 정기를 받아 안을 수 있는 기회다. 보는 것만으로도 신령스러움이 묻어난다. 5m 아름의 단단한 몸매에 그리 크지 않은 10m 키의 대왕소나무는 동쪽으로는 울진 바다를 바라보고, 서쪽으로 태백산맥의 정기를 받는 듯 암벽에 굳건히 뿌리내리고 있다.
여기서 대왕소나무의 정기도 마시고 도시락도 먹는다면, ‘공기 반 소리 반’이 아니라 ‘정기 반 도시락 반’이다. 잠깐의 ‘깔딱고개’였지만 꽤 오르막이 있었던 산행 후에 먹는 도시락이 꿀맛이다. 음식과 함께 숲의 기운을 받아 마신다.
언뜻 사람의 손이 덜 간 숲은 불편할 것 같지만 그 나름의 편안함을 준다. 딱 사람이 걷기 좋을 만큼만 다듬어진 숲길은 평온하고 고요하다. 흐르는 냇물에는 돌로 된 징검다리나 통나무 다리가 놓여 있고 바닥을 폭신하게 하는 낙엽은 발길의 벗이 된다.
“홀로 앉고, 홀로 눕고, 홀로 걷고, 부지런히 홀로 자신을 길들이는 사람은 숲에서 즐거워하리.”
불교 경전인 <법구경>의 한 구절이다.
쉬운 듯, 참 어려운 일이다. 걷기란 누구든 할 수 있는 쉬운 운동법이자 명상법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에 습관을 들이고 시간을 내는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어쩌다 가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라도 숲에 들어서는 건 행복한 일이다. 계절의 변화를 가장 속속들이 느낄 수 있는 곳이 숲이다. 숲의 색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소나무가 아무리 사철 푸르더라도 그 곁을 에워싼 나무들은 저마다가 가진 색으로 숲을 물들인다.
온 산이 초록으로 물들었던 여름에는 구분이 어려웠던 나무들도 가을에는 자기만의 성숙을 뽐낸다. 누구나 푸르게 싱그럽던 젊음을 지나 이제는 성숙의 빛깔을 띤 중년의 색이다. 그것이 비록 곧 다가올 겨울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 빛 속에는 또 다른 봄의 기대가 너울댄다.
숲에서는 너도나도 말은 줄이고 머리는 비우고, 눈은 숲의 색으로 물들이고 폐는 숲의 공기로 가득 채운다. 그것이 숲 속 걷기의 즐거움이다.
2018년에는 소광리 일대에 산림생태휴양단지인 ‘금강송 에코리움’도 생긴다. 울진 금강송을 배경으로 산림, 온천, 해양 휴양을 테마로 숲치유센터와 체험장, 휴양시설 등을 운영할 예정이다. 녹색관광과 산촌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단지가 조성되면 이 지역 일대의 여행이 더욱 편리해질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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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누구나 푸르게 싱그럽던 젊음을 지나 성숙의 계절, 가을을 만난다 2 죽변등대에서 죽변항으로 이어지는 바다 위 데크 산책길 3 내딛는 걸음걸음마저 단풍에 물든다. 4 죽변항에서 맛보는 새콤담백한 물회 한 그릇이 가을의 입맛을 살린다.
불영사에서 작은 쉼, 죽변항에서 바람샤워
금강송 숲길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또 불영사를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타게 되는 36번 국도. 이 국도를 타고 휘도는 불영사계곡은 길에서 만나는 예상된 행운이다. 치솟은 절벽과 그 절벽을 타고 구불구불 돌아치는 불영사계곡은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계곡의 미를 한껏 발산한다. 시 한 수 읊조리고 싶게 만드는 풍경이다.
불영사계곡과 함께 돌아보게 되는 불영사 역시 깊고도 깊다. 누구라도 불영사 입구 주차장에서는 차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 예외는 없다. 매표소와 식당이 있는 불영사 입구에서 불영사까지는 15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왕복 30분이다. 나의 게으름이 발목을 붙잡지만 않는다면 걷는 내내 청정한 계곡과 산이 휘감아 흐르는 모습에 지루하거나 걷기를 후회할 일은 없다. 경내에서 고요히 ‘작은 쉼’을 즐기는 것도 종교와는 관계없는 평화로움이다.
산보다는 바다가 그리운 이들에게도 울진은 그 시리도록 푸른 품을 내어준다. 인근의 죽변항은 마치 “이것이 바다다!”라고 말하는 듯 장쾌하고 시원한 바다를 보여준다. 바다의 가을빛도 여름의 그것과는 무언가 달라졌다. 들어오라고 손짓하던 시원한 바다가 지나가고 이제는 배를 띄우라는 듯 호기로운 바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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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변항, 드라마 <폭풍 속으로>의 세트장이 한 폭의 그림이다.
그 바다를 끼고 데크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호젓하다. 죽변등대에서 시작해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을 거쳐 천천히 20~30분간 바다와의 산책이다. 대나무가 빼곡한 산책로에서는 나와 바다 둘뿐이다.
바람 부는 바닷가에서 지난했던 마음을 바닷바람으로 한바탕 씻어낸다. 바다 요리를 먹지 않아도 입으로 들어오는 바람의 바다 맛이 짭조름하다.
여행 정보
울진군청 문화관광과 054-785-6393 금강소나무숲길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 480-1, 054-781-7118 불영사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불영사길 48, 054-783-5004 죽변항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리, 054-789-6900
교통 울진 금강송 숲길로 접근하려면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용이 편리하다.
중앙고속도로 풍기IC > 소백로 > 가흥삼거리 > 서천교사거리 > 구성로 > 광복로 > 원당로 > 상망교차로 > 현동1교차로 > 36번 국도
식당 왕돌회센타(물회·대게) 0507-1441-0106 이게대게(대게요리) 054-787-8383 불영계곡휴게소식당(송이버섯된장찌개) 054-782-1661
숙박 통고산자연휴양림 경북 울진군 금강송면 불영계곡로 880, 054-783-3167 덕구온천리조트 경북 울진군 북면 덕구온천로 924 덕구온천관광호텔, 054-782-0677 피렌체고궁 경북 울진군 죽변면 죽변중앙로 235-8, 054-783-0393
이송이 | 여행작가
사진|이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