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6대 왕 고종(高宗)의 친아버지로, 아들인 왕보다 더 강한 권위를 갖고 권력을 행사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 조선 말 권력의 중심이었던 흥선대원군의 생애와 사상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지난 12월 7일부터 열리고 있는 ‘운현궁,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 전시다. 이 전시는 내년 3월 4일까지 이어진다.

ⓒC영상미디어
이번 전시는 서울역사박물관의 최대 컬렉션인 운현궁(雲峴宮) 유물을 선보이는 자리다. 서울역사박물관은 1993년부터 지금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운현궁 소장 유물을 기증받았고, 또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관련 유물을 집중 수집해 현재 8000여 점의 유물과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인 열두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실제 운현궁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근처에 자리하고 있다. 고종의 잠저(潛邸)이자 조선 말 권력의 중심이던 흥선대원군의 거처였던 만큼 원래는 궁궐에 비교될 만큼 크고 웅장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我在堂)이 현재는 없어지고,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과 안채인 노락당(老樂堂), 별당인 이로당(二老堂)이 남아 있다. 이 운현궁은 주인인 흥선대원군의 생애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1820년 남연군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898년 79살에 숨을 거두었다. 열두 살에 결혼해 서른셋에 둘째 아들 이재황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고종이다. 1864년 이재황이 왕위에 오르며 흥선대원군은 비로소 조선 권력의 핵이 된다. 그리고 그의 거처인 운현궁 역시 세간에 조선 권력의 중심지로 불리게 된다. 고종이 대제학이던 김병학에게 짓게 한 ‘노락당기(老樂堂記)’에 “노락당(운현궁의 안채)과 하늘 사이가 한 자 다섯 치밖에 안 된다”라는 글귀가 나올 만큼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권력과 야망의 상징이자 집권과 실각을 반복했던 그의 생애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공간이다.

▶ ‘운현궁,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 전시장 내부 모습 ⓒC영상미디어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운현궁,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 전시에서는 이 같은 흥선대원군과 또 그의 생이 그대로 담겨 있는 운현궁을 만날 수 있다. 지난 12월 10일 ‘운현궁,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을 찾았다. 전시회에는 가족 중심의 관람객이 많았다. 전시 장소 곳곳에서 흥선대원군과 고종, 조선 말 상황 등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는 듯한 부모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조선 말 권력의 중심 흥선대원군과 운현궁
이번 전시는 흥선대원군의 예술 세계나 작품, 또 그의 정치적 입장과 권력 관계를 소개해오던 기존의 전시들과 달리, 고종이 즉위한 때부터 40년의 재위기간에 이르기까지 흥선대원군의 생애와 시선을 따라 운현궁에 담긴 역사와 유물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획됐다.
서울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로 들어서면 흥선대원군의 생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연대표가 가장 먼저 관람객들을 맞는다. 이 연대표를 따라 걷다 보면 정면으로 만나게 되는 벽 가득히 흥선대원군의 초상화가 등장하며 본격적인 운현궁 여행이 시작된다. ‘운현궁,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 전시는 운현궁의 주요 공간 세 곳을 재구성한 형태로 관람객을 맞고 있다.
관람객들이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첫 전시 공간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이 행사하던 조선 말 정치권력의 심장부 ‘노안당(老安堂)’이다. 고종 즉위 직후인 1864년 만들어진 노안당은 조선 후기 나이 어린 국왕의 명령보다 강한 권위와 힘을 가졌던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가 내려지던 정치적 공간이다.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통치체제를 구상했고, 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또 조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경복궁 재건을 구상했고, 호포제와 사창제, 서원 철폐 등의 사안을 논의하던 공간이다.
정치적 공간인 동시에 예인으로서 흥선대원군의 삶을 함께한 공간 역시 노안당이다. 집권과 실각을 반복했던 흥선대원군. 그가 실각 후 재집권을 도모하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며 칩거하며 난(蘭)을 치던 예술적 공간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에게 서화를 익혔다는 이야기는 꽤나 알려져 있다. 30대에 이미 한자 서체 중 하나인 예서(?書)와 묵란(墨蘭)에서 조선 제일로 불렸을 만큼 서화에 능한 흥선대원군이었다. 노안당은 그런 그가 실각 후 자신의 정치적 상황을 표현했던 노근란과 석란 등 개성 넘치는 화풍을 일구어낸 공간이기도 하다.
운현궁,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에 재구성된 노안당 공간에서는 ‘군란도’와 ‘난석도’, ‘난석도 대련’ 등 흥성대원군이 직접 화폭에 그려낸 난들을 만날 수 있다.
노안당을 지나면 노락당(老樂堂)을 재구성한 공간을 만나게 된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인 안채다. 1864년 노락당과 함께 만들어진 곳으로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생활공간이자 결혼과 회갑 등 대형 가족행사를 치르던 곳이기도 하다. 1866년 즉위한 지 3년째이던 열다섯 살의 고종이 한 살 더 많은 명성황후와 혼례를 한, 즉 가례(嘉禮)를 치른 곳이 바로 노락당이다.
노락당에서 치러진 고종의 가례는 역대 왕들과 진행된 형태는 같았지만 규모에 있어서는 역대 왕들 중 가장 성대했다. 운현궁에서 왕이 왕비를 모시고 가는 의식인 친영례(親迎禮)를 마치고 환궁 행렬에 동원된 인력과 말이 총 2430여 명에 690여 필이나 됐을 정도다. 이번 전시에는 보물 제1901-2호 ‘고종·명성황후 가례도감의궤’를 통해 당시 진행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절차와 내용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 1 흥선대원군이 72세 때 그린 12폭 ‘석란도’ 병풍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 ⓒC영상미디어
이로당(二老堂)은 1869년 운현궁에 추가로 만들어졌다. 권력을 내려놓은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가 노년을 보낸 곳이다. 1891년 흥선대원군과 민씨가 회혼례(回婚禮)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이 공간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송수구장십청병풍’이다. 최초로 공개되는 이 병풍은 큰아들 이재면이 회혼(回婚)을 맞은 흥선대원군 부부에게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아홉 악장(樂章)을 비단에 써서 흥선대원군 부부에게 선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많은 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는 흥선대원군의 노년기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는 자료인 셈이다.
‘운현궁,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 전시에는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보정부에 유폐돼 있던 흥선대원군의 당시 생활상 일부도 최초로 공개됐다. 1882년부터 1885년까지 흥선대원군의 청나라 유폐 당시 상황과 생활상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가 고독한 유폐 생활을 어떻게 견뎠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자료들을 만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유폐 생활상을 가족들에게 알리기 위해 보냈던 짧은 편지들과 당시 그가 청나라 문인들과 교류했던 기록들, 또 손자인 이준용의 생일 선물로 그려 보냈던 묵란화와 유폐생활 기록인 ‘석파잡기(石坡雜記)’를 만나볼 수 있다.
청나라 유폐 당시 생활상 최초 공개

▶ 운현궁이 보유한 토지 재산이 기록돼 있는 ‘양안’ 유물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 ⓒC영상미디어
흥선대원군의 정치 공간이던 운현궁의 재정 상황 역시 이번 전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는 운현궁의 재정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회계장부 ‘통조수지(統照須知)가 공개됐다. 이번에 공개된 통조수지에는 1889년 1월부터 1892년 1월까지 운현궁의 수입과 지출 등 세부 정보가 기록돼 있다. 이 장부를 통해 운현궁은 다양한 수입원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토지대장에 해당하는 운현궁의 양안(量案)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다. 운현궁은 김포, 부평, 김제, 광양, 순천, 김해는 말할 것도 없고 황해도 재령과 사리원 등 전국에 걸쳐 많은 토지를 보유하며 상당한 지대 수입을 거두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운현궁에서 저수지나 보의 소유건도 갖고 있어 농민들에게 매년 물세도 받았다는 것이다.
운현궁에서는 일반 사가(私家)와 마차가지로 등잔과 소금, 식초, 기와 이불 등을 구입해 사용했으면, 또 사치품으로 볼 수 있는 녹용과 인삼 등의 내역도 찾아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에 앞서 1897년 12월 부대부인 민씨가 먼저 운현궁 이로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1898년 2월 자신의 정치 공간이던 노안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은 당시 부대부인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운현궁에 예장청을 설치해 상장례를 주관하게 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임시 관청인 예장청이 설치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 예장청에서 작성한 장례에 관한 의식과 절차 등을 정리한 책이 ‘예장청등록’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 예장청등록의 내용을 바탕으로 상장례 과정 전체를 정리하고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운현궁, 하늘과의 거리 한 자 다섯 치’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최근 운현궁으로부터 기증받은 ‘임인지연도병풍’을 만날 수 있다. ‘임인진연도병풍’은 1902년 51세가 된 고종이 기로소(耆老所, 나이가 많은 왕이나 정이품 이상의 고위 관리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됐던 기구)에 들어가는 것을 기념해, 새로운 왕궁인 경운궁에서 열렸던 궁중 행사를 그림을 담아놓은 병풍이다.
이번 전시는 운현궁을 통해 흥선대원군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그가 걸어온 삶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조동진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