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가 아닌 시민이 만들어가는 문화 비전이 마련됐다. 누구나 자유롭게 표현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문화’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더불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훼손된 문화행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려는 한 과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새 문화정책 준비단은 5월 16일 ‘사람이 있는 문화-문화비전 2030’(이하 문화비전 2030), ‘사람이 있는 문화, 예술이 있는 삶’(이하 새 예술정책)을 발표했다. 문화예술인의 지위를 보장하고, 국민이 문화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바탕을 조성하겠다는 목표다.
문화비전 2030은 자율성, 다양성, 창의성 등 세 가지 핵심가치를 근간으로 9개 의제와 37개 주요 과제를 담고 있다. 우선 9개 의제는 ▲개인의 문화권리 확대 ▲문화예술인·종사자의 지위와 권리 보장 ▲성평등 문화의 실현 ▲문화 다양성의 보호와 확산 ▲공정하고 다양한 생태계 조성 ▲지역문화 분권 실현 ▲문화자원의 융합 역량 강화 ▲미래와 평화를 위한 문화협력 확대 ▲ 문화를 통한 창의적 사회혁신이다.
구체적으로는 여가시간을 확대하고 공간을 제공하는 동시에 비용 부담을 완화해나가기로 했다. 주거 인접지에 가족친화형 ‘문화놀이터’를 만들고 청년통합관광교통카드를 우선 도입하는 방안 등이 담겼다. 정부는 낙후되거나 폐쇄된 기존 놀이터에 문화를 입혀 2030년까지 문화놀이터 100곳을 꾸리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청년들이 국내 여행을 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문화관광 체험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는 통합관광교통카드를 제공할 계획이다.
올해 2만 명을 모집한 근로자 휴가지원제도는 2022년까지 연 10만 명으로 늘린다.
문화예술인의 권리와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장치도 다방면으로 구축할 예정이다. ‘예술가의 지위 및 권리보호에 관한 법률’(가칭)을 제정하고, 생활고 때문에 예술 활동을 중단하지 않도록 창작환경을 지원한다. 이를테면 심리상담, 생활자금 융자, 자녀 돌봄 등 맞춤형 복지 지원으로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의미다.
성평등 문화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제도적 기틀도 마련한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성차별, 위계적 성폭력이 여성 위협적 생태계를 초래하고 이것이 성차별 문화 표현과 활동을 조장하는 악순환을 심화시킨다는 판단에서다. 정부는 성차별·성폭력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피해자 보호·지원을 위한 통합센터를 설립하며, 가해자에 대한 공적 지원과 공모사업 참여를 배제할 방침이다.
문화 다양성의 보호와 확산을 위해서는 장애와 젠더, 지역, 인종 등 정체성과 다양성에 따라 문화예술을 지원하고, 서면계약 위반 여부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도입한다. 다양성 보호 방안의 또 다른 일환으로 ‘문화청년 일만 시간 지원사업’을 추진한다. 청년들이 문화 활동을 통해 지역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문화의 새 성장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다.
문화·예술 분야의 남북 교류를 확대하기 위한 실천 방안도 포함됐다. 남북 문화교류협정 체결과 다양한 사업을 통해 교류협력 기반을 만들어간다는 구상이다. 국제대회 공동 진출과 공동 개최 등으로 체육 교류도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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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5월 16일 ‘문화비전 2030’ 발표 기자회견에서 기조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
문화예술지원체계 독립성 강화
새 예술정책은 예술계와 정부가 함께 구상하는 숙의형·개방형 계획이다. 범정부 차원의 문화정책 방향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더욱 구체화된 정책들이다. 앞서 문화체육관광부는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160여 회 간담회를 진행했고, 2017년 10월 새 예술정책 수립 특별전담팀을 구성해 정책 방향과 과제를 발굴했다. 예술적 표현의 자유와 예술인의 인권 보호, 예술지원체계의 독립성과 자율성 제고, 예술 가치 중심의 창작 지원, 예술인의 삶을 지키는 복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예술 참여 환경 조성, 소수자가 예술로 어울려 사는 사회, 공정하고 활력 있는 예술시장 환경 조성, 예술의 미래 가치 확장 등 8대 핵심과제가 골자다.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명칭을 ‘한국예술위원회’로 변경하고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상 공공기관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2020년까지 추진하기로 했다. 문체부 장관이 임명하던 문예위원장은 위원 간 호선제를 통해 뽑는다. 문예위 사무처 간부직 가운데 일부를 개방형으로 공모하는 한편 지원사업 심의 시 내·외부 강요나 청탁을 의무적으로 신고토록 하는 외압신고제도 도입한다.
문체부의 역할과 기능도 조정된다. 문체부는 ‘지원 심의 불간섭 원칙’을 천명하고 법제도나 중장기 전략 수립, 전략 연구 등에 집중하기로 했다. 특히 예술 지원 성과를 무리하게 계량화하지 않고 질적인 측면을 반영하는 예술 특화형 평가지표를 내년까지 개발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참여 환경도 만든다. 지역 소재 예술대학과 문화예술시설을 연계한 ‘창의예술교육 랩’을 운영해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문화예술 역량을 강화할 계획이다. 올 하반기 시행을 앞둔 공연 관람비, 도서 구입액 소득공제 제도의 안착을 위한 움직임도 분주해질 전망이다. 이 밖에도 문체부는 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문화예술 콘텐츠에 대한 통합정보지원시스템과 공유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을 비롯해 외국인, 탈북민 등 소수자의 예술정책 개발도 추진한다.
도종환 장관은 “우리가 추구하는 ‘사람이 있는 문화’는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환경에서만 실현될 수 있기에 다시는 이러한 (블랙리스트 같은) 불행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철저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나갈 것”이라며 “그 구체적인 내용을 새로운 문화 비전과 예술 정책에 담았다”고 전했다.
이근하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