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의 전유물이었던 학습지 시장에 어른이 등장했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학습지와 이별했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학습지를 다시 찾고 있다. 왜 어른들은 다시 학습지를 풀기 시작했을까?
몇 달 전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배우 윤현민의 일상이 그려졌다. 서점에 가서 사온 책을 펼쳐보기도 하고 외국에서 온 다른 연예인을 찾아가보기도 했지만 결국 학습지를 선택했다. 이 장면을 보고 많은 시청자가 성인이 학습지를 한다는 데 의아함을 느꼈지만 윤 씨처럼 학습지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서울 명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유재민(28) 씨는 얼마 전 학습지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외국인 관광객이 워낙 많은 곳이라 손님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기로 했다. 그러나 선뜻 공부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우연히 텔레비전의 한 프로그램에서 학습지로 공부하는 성인이 늘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 학습지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매장 일이 바빠 가게를 비울 수 없는 상황에서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공부할 수 있고 무엇보다 기초적인 내용부터 쉽게 배울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안소현(36) 씨도 벌써 5개월째 학습지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 안 씨는 근무하는 회사가 일본 업체와 업무 제휴를 하면서 의사소통에 도움이 되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원을 다니려고 했지만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며 학원 갈 시간을 따로 내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동영상 강의를 듣자니 스스로 잘해낼 자신이 없었다. 학습지는 교사가 원하는 시간에 회사 근처로 방문해 오고가는 부담도 없고 진도도 관리해줘 꾸준히 학습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성인 회원 대부분이 자기계발을 위해 학습지를 시작하지만 다른 이유로 학습지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열 살 된 딸을 둔 이민정(43) 씨는 아이 교육을 위해 학습지로 수학과 한자를 배우고 있다. 이 씨는 “부모라면 아이가 수학문제를 물어보는데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아 곤혹스러웠던 경험이 있을 것”이라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해주고 싶어 학습지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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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계발 수단으로 학습지를 선택하는 성인이 늘고 있다. 학습지로 공부했던 이들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어학공부를 주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원그룹 ⓒ조선DB
학습지를 시작한 성인들은 대부분 안 씨처럼 자기계발이 목적인 경우가 많다. 때문에 성인 대상 학습지는 일본어, 중국어 등 어학교육에 치중돼 있다. 학습지 브랜드 ‘구몬학습’을 운영하는 교원그룹에 따르면 ‘구몬학습’을 시작한 성인 회원 수는 2017년 6월 기준 5만여 명으로 2013년 말 2만 명을 밑돌던 수준에서 약 2.7배 증가했다. 성인 회원 수가 눈에 띄게 증가한 과목은 어학계열이다. ‘구몬학습’ 성인 회원 10명 중 7명 이상인 74.6%가 영어·일본어·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그중 일본어를 배우는 성인이 35.6%로 가장 많고 그 뒤를 이어 영어(24.1%), 중국어(14.9%) 순이다.
저렴한 비용·시간 절약 등 장점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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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회원 수가 점점 증가하자 학습지 업계는 어학공부를 위해 학습지를 선택한 성인 회원에게 맞는 서비스를 개발해 제공하고 있다. 교원 ‘구몬학습’의 경우 지난 2016년 11월 성인을 위한 ‘구몬 통신학습’을 선보였다. ‘구몬 통신학습’ 회원은 학습지 교사의 방문관리 없이 한 달에 한 번 우편으로 교재를 받아 공부한다. ‘구몬 통신학습’은 성인 회원 수가 많은 구몬 일본어와 중국어만 받아볼 수 있고 교사가 관리하는 기존 프로그램보다 가격이 20% 정도 저렴하다. ‘눈높이’를 운영하는 대교는 2005년 중국어 전문 교육 브랜드 ‘차이홍’을 출시했다. ‘차이홍’의 성인 대상 프로그램은 비즈니스 회화부터 중국어 자격증 준비까지 회원의 수요에 맞는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들이 학습지를 선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학습지는 다른 교육수단에 비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직장인의 경우 어학공부를 하러 학원 다닐 시간을 내기가 쉽지가 않다. 학습지는 일단 신청만 하면 학습지 교사가 직장 근처로 방문해 30분가량 짧은 시간 안에 공부할 수 있어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않아도 된다. 한 달에 3만 원 정도 되는 저렴한 비용도 학습지 성인 수요자를 늘리는 데 한몫하고 있다. 학원이나 개인과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해 부담 없이 배울 수 있다. 실력에 따라 학습량과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학습지는 과외처럼 본인의 진도에 맞춰 공부할 수 있어 진도가 느려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제대로 배울 수 있다. 매달 학습진도표를 작성해 학습 범위를 확인할 수 있어 학습목표치를 채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안 씨는 “학습진도표를 보면 공부하는 데 동기부여도 되고 꾸준히 공부할 수 있도록 유도해서 학습자가 성취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성인 회원은 스스로 동기부여를 한다는 점에서 어린이 회원과 차이가 있다. 최현정 ‘구몬학습’ 교사는 “성인 회원은 스스로 필요에 의해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에 어린이 회원보다 자기주도적으로 학습을 한다”며 “처음 시작할 때 본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학습 목표를 분명히 설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습 효과도 만족스럽다. 안 씨는 “12월 일본어자격증 시험에 응시할 생각”이라며 “앞으로 1년 6개월 정도 꾸준히 배워 자격증도 따고 회화까지 마스터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런 장점 때문인지 학습지를 접해본 성인 회원들이 주변에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블로그,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학습지 공부의 장점이 널리 퍼지면서 성인 회원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공부하는 어른’이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본다. 이상연 IBK경제연구소 팀장은 “학습지 열풍은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는 등 미래가 불안해진 성인들의 자기계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며 “급격히 변하는 사회에 초조함을 느끼며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성인은 앞으로도 꾸준히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가현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