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대한민국 광복 70년이다. <위클리 공감>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함께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고 느낄 수 있는 특별기획을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3·1운동은 물론 안중근 선생의 숨결, 근현대사의 발자취 등 역사 속 생생한 순간들을 사진과 유물을 통해 만나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역정에서 가장 찬연한 자취를 남겼다.
우리 민족의 자유와 인류 정의를 위해 불같이 솟구쳤던 3·1운동은 곧 민족정신의 표상이었다. 3·1운동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200만 명 넘게 참가했고, 국내외 각처에서 1500여 회에 달하는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일제의 총검 아래 7500여 명이 살해당하고, 1만 6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5만여 명이 체포·투옥되는 참화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희생은 우리 민족의 존엄성과 자주 정신을 만천하에 천명한 것이었기에 결코 헛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3·1운동의 정신은 민족 자주와 인류 평화를 지향하는 우리 민족에게 영원한 횃불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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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 대표 29인. /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민족의 이름으로 만세 운동
대내외에 충만한 의지 보여줘
3·1운동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민족의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기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국내외 어느 곳이나 ‘독립선언서’와 ‘독립 만세 시위’가 잇따랐다.
독립을 선언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은 것은 3·1운동이 추구한 최고의 이념이자 방략이었다. 일본 도쿄에서 선포한 2·8독립 선언서와 서울의 독립선언서, 중국 만주의 길림에서 선포한 대한독립선언서, 북간도 용정의 선언서, 연해주의 니콜리스크(현 우수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선포한 조선독립선언서 등은 3·1운동을
대표하는 독립선언서였다.
이들 선언서는 나라의 독립은 물론 새로운 시대의 민주적 정치 이념과 인도주의에 바탕을 둔 세계 평화를 지향했다. 즉 주권 독립, 민주주의, 인도주의, 세계 평화가 3·1운동의 기본 정신을 이룬 것이다. 이들 선언서는 주권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논리와 새롭게 건설할 독립국가의 이념과 방향까지 제시했다. 그 속에는 한국인의 자주는 물론 인류 평등의 주장과 함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담겨 있었다. 그만큼 3·1운동의 이념과 사상은 폭넓고 다원적이었다.
그리고 3·1운동의 근대적 이념과 사상은 독립운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되었다. 3·1운동 직후 생겨난 임시정부는 그 대표적 결실이었다. 3·1운동의 영향으로 국내외 각처에서 무려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여러 곳에서 생겨났다고 해서 독립운동이 난립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권 독립을 지향했던 독립운동계의 충만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임시정부는 분립하지 않고, 1919년 9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이 역시 3·1운동에서 보여준 민족적 통합의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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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44.9×20.1cm│1919년
종교와 이념까지 초월
진정한 평화 운동
무엇보다 만세 운동에는 남녀·성별의 차이와 종교 간의 반목과 직업의 귀천이 없었다. 국내뿐 아니라 한국 사람이 사는 해외에서도 하나가 되어 만세 운동을 벌였다. 친일 매국노가 아니라면 누구나 민족 독립의 염원을 담아 만세 운동에 동참했다.
종교계와 학생이 앞장서고, 농민과 노동자가 군중을 이루고, 어린이·걸인·기생까지 만세 시위에 가담하면서 점점 확산되어나갔다. 3·1운동은 전 민족적 총화를 통해 민족 내부의 갈등과 모순을 용해시킬 수 있었다. 각 정파의 종교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어 만세 시위를 추진해갔던 사실은 그 본질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이 독립을 선언했고 아울러 전국의 종교 조직을 기반으로 3·1운동의 대중화에 불을 당겼다. 그리하여 중앙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지방의 천도교와 기독교 신도들, 불교 승려와 기독교 전도사들이 힘을 합쳐 만세 시위를 전개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의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 독립을 위한 광장에서 합류해갔다.
당시 종교계가 하나로 결집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종교적 배타성이 강했던 서구의 시각에서 본다면 민족 독립을 위해 종교와 이념을 초월했음은 더욱 놀라운 사실이었다. 다종교인 우리 현실에서 종교적 의식이 민족적 의식보다 앞서 있었다면 3·1운동의 일원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계사에서 보듯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기나긴 종교전쟁, 종교 간의 갈등으로 민족이 분리된 인도의 사례처럼 종교적 배타성이 민족성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우리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초월해 힘을 합쳐나간 것이다.
역사는 오늘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현재를 정확히 알고 미래를 올바르게 전망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거울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3·1운동의 역사를 오늘의 현실처럼 살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고, 현재의 삶도 역사처럼 가꾸어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원류이자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신적 원천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좌표이다.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일어난 3·1운동은 참으로 위대한 민족운동이자 진정한 평화운동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3·1운동의 정신과 의미를 새 시대에 맞게 계승·발전시켜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3·1운동의 정신을 미래의 등불로 삼아 민족 통합, 나아가 인류 평화를 위한 지혜를 모으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글 · 장석홍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갸기> 제7호 2015.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