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이고 실용적인 한복을 디자인해 보급하기로 작정한 황이슬씨는 기존의 틀을 깬 한복을 만들어 주목을 받고 있다.
전통 한복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매가 물고기 배처럼 볼록하다는 것이다. ‘배래’라고 부르는 이 부분은 곡선의 여유로움을 나타내며 한복의 직선과 멋스럽게 어우러진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불편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룩이 묻어 지저분해지기가 쉽다. 그래서 술잔을 들거나 음식을 먹을 때는 한 손으로 배래를 잡아야 한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불편함을 극복하기 쉽지 않은데, 배래가 없는 한복은 어떨까?
한복의 동정은 한복스러움의 대명사다. 흰 종이나 천으로 만들어 다림질을 해 목 주변에 붙이는 동정은 세탁할 때마다 분리했다가 붙여야 했다. 때가 쉽게 묻는 목의 안쪽은 옷의 다른 부분과 같은 천으로 하고, 눈에 보이는 바깥쪽만 흰 천을 붙이면 한복이 아닐까? 굳이 세탁할 때마다 분리하지 말고 그냥 붙인 채 세탁하면 좀 편리한 한복이 되지 않을까?
고름을 단추로 대체하면 어떨까? 한복의 저고리나 두루마기의 앞을 고정하기 위해 가슴 근처에서 묶는 폭이 약간 있는 두 개의 끈(고리)은 묶는 방법이 익숙해지기엔 시간이 걸린다. 묶는 대신 단추로 고정하면 편리할 텐데….
▶방탄소년단의 멤버 지민이 황이슬 씨가 디자인한 한복을 입고 공연하고 있다.│트위터 mighty_jimin
직원 11명이 한 해 20억 원 매출 올려
한복 디자이너 황이슬(32) 씨는 이런 기존 한복의 불편함을 ‘용감’하게 극복한 한복을 만들었다. 그가 입은 한복은 배래와 고름이 없고, 동정도 바깥쪽뿐이다. 소매는 일반 서양식 옷과 폭이 같고, 고름이 달려 있어야 할 곳에는 맵시 있는 단추가 대신하고 있다.
치마 길이도 짧다. “한복 치마를 입고 계단을 수없이 올라 다녔어요. 치마 길이를 여러 가지로 만들어 오르내린 결과, 발목 위 15㎝가 가장 편안하다는 것을 알았지요. 너무 짧지도 길지도 않으면서 한복의 맵시를 유지하고 활동이 편안한 최적의 치마 길이인 셈이죠.”
2018년 말, 황 씨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세계적인 K–팝 그룹인 방탄소년단(BTS)의 스타일리스트에게서 온 전화였다. “연말 큰 시상식에 입고 나갈 한복을 협찬해주실 수 있나요?” 거짓말 같았다.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무대였다. 마침 BTS가 부를 노래는 ‘아이돌’. 가사에 “지화자 좋다” “덩기덕 쿵더러러 얼쑤” 같은 국악풍의 추임새가 있어 한복을 입기로 했단다. 모두 10벌을 협찬했다. 하지만 정작 무대 공연 때 입을지 여부는 최종 순간까지 가봐야 알 수 있다. 한복 디자인을 한 경력도 짧고, 관련 전공이나 학벌도 없는 황 씨에게는 큰 기회였다. 다행히 BTS의 지민이 협찬한 바지를 입었다. 전통 대님이 없는 활동적인 남성용 한복 바지였다. 시가 10만 8000원짜리 기성복. 자신이 디자인하고 만든 한복을 입은 BTS 지민의 공연을 방송으로 보며 황 씨는 뿌듯했다. 방송 덕분인지 지민이 입고 공연한 한복 바지의 주문이 평소보다 훨씬 많이 들어왔다.
“한복 디자인이나 의상 디자인을 전공했나요?” 그를 만나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다.
형식을 파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는 23살에 한복을 디자인해서 파는 회사를 만들어 ‘성공’한 디자이너로 꼽힌다. 고향인 전주역 앞의 4층짜리 빌딩을 한복을 팔아서 샀다. 이미 20대에 한복을 팔아 돈을 번 것이다. 직원 11명이 한 해 20억 원의 매출을 한복을 팔아 올린다. 그는 20살 때까지 한 번도 서울에 가본 적이 없다. 전주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전북대학교에서 한복과 전혀 관계없는 산림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의상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독학한 것도 아니다. 산림공무원이 되려고 전공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한복 디자인을?
▶활동적인 한복을 디자인하는 황이슬씨가 자신이 만든 한복을 입고 전주 한옥 마을에서 운동화를 신은 채 뛰고 있다.
한복 차림으로 길거리 나서면 통쾌
그의 사무실 책상에는 갖가지 한복 옷감과 재단용 자, 가위 등이 가득 놓여 있다. 책상 맞은편 유리에도 옷감과 연락처, 메모지가 빼곡히 붙어 있다. 그가 작업한 디자인 용지에는 축소해서 그린 한복 디자인과 치수, 선택한 옷감이 붙어 있다. 마치 학생들이 인형 옷을 만들기 위해 디자인 작업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전공한 것이 아니라서 처음부터 자신의 스타일대로 작업한 결과다.
“멋있고 편안한 한복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가 전공과 관계없는 한복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 한 권의 만화책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가입한 만화 동아리에서 축제 때 만화 속 주인공 모습을 흉내 내는 코스프레를 진행했다. 당시 인기 있던 만화 <궁>의 여주인공 옷을 만들어 입기로 했다. 한복을 종이에 그려 침구·커튼점을 운영하던 어머니에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축제하는 날 황 씨는 ‘스타’가 됐다. 세상 어디서도 보기 힘든 색다른 한복을 입은 그를 모두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축제를 마치고 집으로 갈 때 그는 갈아입지 않고 한복을 입은 채 자전거를 끌고 40분 동안 길거리를 다녔다. 뻔뻔해짐이 통쾌함으로 연결됐다.
“‘틀 깨기’에 빠져들었어요. 주변의 시선이라는 틀을 깼고, 늘 하던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즐겼어요. 그리고 알게 됐어요.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고, 대중에게 보여줘서 관심을 끄는 것에 큰 성취감을 느낀다는 것을.”
한복을 입고 길거리에 나서면 창피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신이 났다. 며칠 지나서 문득 한복을 인터넷을 통해 팔아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젊은 세대가 좋아할 독특하고 깜찍한 디자인의 한복을 만들어 올리자 반응이 왔다. 한복의 ‘한’ 자도 몰랐던 초짜의 한복을 돈을 주고 사겠다고 나서는 상황이 신기했다. 미국으로 유학 가는 학생은 유학 기간 중 파티에 입고 갈 한복을 찾다가 황 씨가 디자인한 옷을 샀다고 했다.
‘틀 깨기’의 성취감을 맛본 황 씨는 산림공무원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한복 디자이너로 방향을 틀었다. 사실 한복 디자이너가 되는 정식 루트도 없었고 지침서도 없었다.
“대표적인 한복 디자이너인 이리자, 이영희 선생님도 어릴 적 자연스럽게 한복 바느질을 접하고 스스로 옷을 지어 입은 것이 계기가 된 것입니다.”
▶황이슬 씨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복 디자인에 열중하고 있다.
동생 등 모델, 똑딱이 카메라로 찍어
인터넷 쇼핑몰을 만들었다, 홈페이지는 무료로 제공되는 쇼핑몰 호스팅을 이용했다. 사업자 등록을 하고 통신판매업 신고를 하는 데 4만 5000원이 들었다. 홈페이지에 올릴 사진과 상품이 필요했다. 사진기는 집에 있던 ‘똑딱이’ 카메라를 사용했고, 모델은 동생과 동생 친구들을 동원했다. 돈 내고 전문 스튜디오를 빌릴 수 없었다. 스튜디오는 방 안 벽면과 거실 커튼 앞이었다. 마침 예전에 한복집을 하신 아버지 친구분이 창고에 보관하던 한복 옷감을 100만 원에 샀다. 1000만 원어치의 옷감이었는데 시간이 지난 탓에 싸게 샀다. 2년간 한복을 만들어 팔 수 있는 옷감으로 충분했다.
우선 왜 한복이 대중화가 안 되는지를 꼽아봤다. “기존 한복은 기성복이 아닌 맞춤이 주류였어요. 젊은이들이 맞춰 입으려면 부담스러웠지요. 기성복으로 만들려면 사이즈가 표준화돼야 하는데 그런 표준화 기준이 없었어요. 한복을 입으려면 결혼식 등 특별한 날이고, 이유가 있어야 했어요.”
황 씨는 자신이 만드는 한복의 목표를 정했다. “젊은이가 스타벅스 커피 잔을 들고, 명동 한복판에서 운동화 신고 편히 입을 수 있는 예쁜 한복을 만들고 싶었어요.”
우선 아이 백일이나 돌잔치 때 아이와 엄마가 커플 룩으로 입을 수 있는 한복을 만들어 대여하기 시작했다.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한복을 구입하기에 부담이 크던 젊은 엄마들은 옷을 대여해 입고 사진을 찍은 뒤 되돌려주는 방식에 익숙했다. 한류를 타고 한복을 구입하려는 외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영문으로 된 한복 사이트도 만들었다.
‘손짱’이라는 브랜드로 한복을 만들기 시작했고, 2014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본떠 ‘리슬’을 론칭했다. 생활한복과 한주얼(한복+캐주얼) 한복을 주로 디자인했다. 자신의 한복 브랜드 창업기를 자세히 소개한 <나는 한복 입고 홍대 간다>를 출간하기도 했다.
“리슬이 만든 한복은 운동화와 하이힐, 선글라스와 스키니진에도 어울리는 한복입니다. 소재도 면 혼방, 폴리에스테르 등 신소재를 쓰고 쇼핑몰용 모델 사진도 길거리나 영화관, 카페 앞에서 운동화를 신고 커피를 들고 찍어요.”
▶다양한 한복 옷감이 황이슬 씨 작업대 앞 유리에 붙어 있다.
전형적 옷감 외에 가죽도 소재로
황 씨는 스스로 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홍보했다. 1년에 100일 한복 입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한복 입고 홍대 클럽 가기, 한복 입고 장보기, 한복 입고 포장마차 가기 등을 실천한 뒤 사진을 찍어 올려 대중과 소통했다.
“일상 속에서 한복을 입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었어요. 아침에 옷장 문을 열면 옷걸이에 걸린 옷 중 하나로 자리를 차지해 골라 입을 수 있는 한복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의 한복은 기존 한복에서 보면 파격이다. 저고리가 없거나, 몸에 딱 달라붙거나, 무릎 위로 올라가거나, 시원하게 반팔 소매를 적용했다. 소재도 전형적인 한복 옷감 외에 가죽도 쓴다.
“한복은 우리 역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은 거울 같은 존재입니다. 박물관 유리 너머의 진열된 옷이 아닌 생활 속 옷이 돼야 해요.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청바지처럼 편안하면서도 멋스러운 일상복으로 한복을 입히고 싶어요.”
전주뿐 아니라 서울 강남 가로수길의 유명 백화점에서 운영하는 매장에도 진출했다. 최근에는 한복과 어울리는 가방, 액세서리를 만들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해서 2000만 원을 모았다. 황씨는 한국 공예·디자인 문화진흥원 한복진흥센터가 주최한 한복개발 프로젝트, 우수문화상품 지정제도 (한복분야)등 한복 관련 산업에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황 씨는 당당한 한복 디자이너를 추구한다. “지속 가능한 브랜드를 만들고 싶어요. 전통을 지킨다는 이유로 자생력 없이 보조금에 의지하는 회사가 되고 싶지 않아요.” 황 씨가 전주의 한옥마을 한복판을 뛴다. 자신이 디자인해 만든 한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머리도 묶지 않은 채…. 자연스럽다. 편해 보인다.
글·사진 이길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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