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테리아, 담다… 다음이 어디더라?”
김아란 씨는 오늘 다닐 카페 순서를 곱씹었다. 함께 다니는 사회복지사가 “갤러리 예인”이라고 말하자, 그는 “맞다!” 하고 소리쳤다. 김아란 씨가 첫 카페에 들어서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자 카페 점원은 그날 모은 커피박(커피 찌꺼기)을 건넸다. 이날 김 씨는 대전 동구의 카페 서른두 곳을 돌았다. 두 시간 반에 걸쳐 모은 커피박 양은 약 80kg. 김 씨는 차곡차곡 모은 커피박을 가지고 거북이보호작업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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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북이보호작업장 김아란 씨가 대전 카페에서 커피박(커피 찌꺼기)을 수거하고 있다.
2 김명종 씨가 커피박 건조 과정을 거치고 있다. ⓒC영상미디어
보호작업장은 중증장애인에게 보호고용의 기회를 제공하는 직업재활시설이다. 대전 동구에 위치한 거북이보호작업장에는 스물한 명의 장애노동자가 자활하고 있다. 이때 자활이란 경제 개념과 생활 개념 모두를 아우른다. 거북이보호작업장의 장애노동자는 지체장애 1~3급, 뇌병변장애, 자폐장애 등 대다수 중증장애인이다. 대표적인 업무는 비닐하우스를 연결하는 하우스클립을 조립하는 일이다. 최근 새로 생긴 일이 하나 더 있으니 커피점토 제작이다.
버려지던 커피박, 화분이 되어 생명을 담다
커피점토는 김 씨가 카페를 돌며 수거한 커피박으로 만든다. 휴지, 영수증 등 이물질을 제거한 커피박은 건조 기계에 들어간다. 열여섯 시간의 건조 과정을 거쳐 고운 커피박 가루만 걸러낸다. 여기에 점토분말을 섞으면 커피점토가 된다. 커피점토는 화분으로 만들어 3~4일간 건조하고 나면 튼튼한 화분이 된다. 재활용봉투로 직행할 뻔한 커피박이 일주일의 수가공을 거쳐 친환경 제품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일종의 ‘업사이클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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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영상미디어
거북이보호작업장이 커피점토를 만들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중증장애인의 임금 때문이다. 하우스클립 조립으로는 500개당 2500원을 받는다. 중증장애인이 조립하는 양이 1000개 미만임을 감안하면 월급 10만 원 정도다. 물론 그보다 많은 임금을 받는 장애노동자도 있지만 수익 자체가 너무 낮다. 이마저도 작업 발주가 끊기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중증장애인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그동안 신문 포장, 스티커 동봉 등 극도의 단순 작업만 해온 이유기도 하다.
임금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거북이보호작업장의 박해영 시설장은 “최저임금을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데, 이 과정이 갑작스레 강제될 경우 오히려 중증장애인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상황이 발생할까 봐 걱정”이라며 “그에 상응하는 임금을 국가에서 보조해주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또한 안정적인 작업 환경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간혹 일을 잘하는 장애노동자를 일반 기업에 추천하지만 중증장애인은 경증장애인과 달리 고용과 보호가 동시에 필요하다. 때문에 일반 기업에 가도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박해영 시설장은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수익 창출 방안을 고민했다. 장애인이 만들었으니 사달라고 하는 건 싫었다. 다른 보호작업장에서 만들고 있는 제품으로 장애인끼리 경쟁을 심화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닌 듯했다. 거북이보호작업장만의 차별성 있는 제품이 필요했다. 박 시설장은 “버려지는 커피박을 활용하면 비용이 적게 들 것 같았다”고 했다. 대전 ‘커피클레이’에 문을 두드렸다. 커피클레이는 커피박을 활용해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는 ‘커피큐브’의 협력업체였고, 거북이보호작업장과 함께하기로 했다.
기술이 마련됐으니 이제 필요한 건 커피박. 박 시설장은 대전 동구에 소재한 카페를 돌아다니며 취지를 설명했다. 서른두 곳의 카페가 동참하기로 했다. 커피점토를 만드는 데 필요한 설비도 갖췄다. 건조기는 마련했지만 현재 점토 제품을 매끄럽고 갈라지지 않게 진공으로 반죽하는 토련기는 구비하지 못했다. 토련기 마련에 부족한 재원은 소셜 펀딩을 통해 많은 사람의 응원을 모으고 있다.
느리지만 나아가는 거북이들에게 관심과 보호를
그래도 벌써 화분 600개 납품 예약을 받았다. 발주 작업량을 맞추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커피점토로 화분을 만드는 일 자체가 중증장애인들에게는 큰 도전이다. 그래도 땀 흘리고 보상받는 맛을 천천히 알아가는 중이다.
최당성(지체장애 3급) 씨는 “커피를 수거하면 돌아다녀야 하니까 힘들다”면서도 “일하고 받은 돈으로 시장에 가서 호떡, 떡볶이를 먹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김명종(지체장애 2급) 씨도 “월급을 받아 신발을 샀다”고 자랑했다. 장애노동자들이 조금씩 속도를 내준다면 거북이보호작업장의 다음 행보는 판로 개척이다. ‘중증장애인생산품 우선구매특별법’을 적용해 학교의 교구(敎具)로 납품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장애인이 일자리를 구하기란 쉽지 않다. 일자리를 지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장애인고용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장애 인구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38.7%로 전체 인구의 경제활동 참가율 63.6% 대비 24.9%가 낮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거북이처럼 우리 사회의 더 많은 거북이들이 전진할 수 있게 관심과 보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