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스캔들’이라는 행운이 내 인생에 찾아온 뒤 감사한 시간을 보냈다. 그 후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좋은 작품을 만나 행복한 한때를 보내기도 했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한동안 쉬어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고단했던 건 끊임없는 고민이었다. 사람들이 내게 바라는 이미지와, 내 실제 모습이 다르다는 생각이 나 자신을 괴롭혔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으로 봐주는 건 고마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데’라는 아쉬움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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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돌연변이’ 중 ⓒ박보영
그러다 2015년 ‘돌연변이’를 만났다. 신인감독의 독립영화였던 ‘돌연변이’는 제약회사의 생동성 실험에 참여했다가 돌연 생선인간이 돼버린 청년 박구의 이야기다. 내가 맡은 역할은 박구를 이용해 이슈녀가 되고 싶었던 키보드 워리어 ‘주진’이었다. 사랑스러운 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인물이 나는 좋았다.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는 주진이 내게는 사랑스러웠다. 그건 아마 내게 없는 모습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사실 ‘돌연변이’라는 작품 자체가 그랬다.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신이 나 있었다. 예산이 많지 않아 혹한의 추위와 싸우면서도 누구 하나 얼굴 찌푸리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집에서 핫팩을 준비해 와서 나누어주며 서로를 북돋아줬다. 웃음과 활기가 넘치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다시 한 번 ‘현장에서 부대끼는 기쁨’을 되찾았다. 나를 둘러싼 한계를 뛰어넘는 기쁨이었다.
‘돌연변이’의 주진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외로울 것 같지 않아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고기도 아니잖아. 꼭 나 같애.” 나는 이 말에 위로를 받았다. 세상에는 그런 존재들이 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들. 아마 그즈음 나는 배우 박보영과 인간 박보영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 같다. 대중이 기대하는 모습과 실제의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사람들이 찾아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과,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이 함께였다. 작품이 잘될 때도 그랬다. 행복한 순간에도 행복해하지 못하는 내가 다름 아닌 돌연변이 같았다. 그즈음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네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잘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의 의미를 점점 더 알겠다. ‘과속스캔들’에 이어 ‘늑대소년’, ‘피 끓는 청춘’, ‘경성학교’ 등을 찍었을 때 사람들은 “언제까지 교복을 입을 거냐”고 물었다. 이후 ‘오 나의 귀신님’, ‘힘쎈 여자 도봉순’을 만났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내 연기를 두고 성인이냐 아니냐를 나누지 않는다. 이렇듯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있다. 그 흐름에 맡기면 고민할 일도 적어진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해나가다 보면, 교복 입은 연기도 성인 연기도 물 흐르듯 흘러간다.
이번엔 교복 입은 여고생으로 시작해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에 이르는 ‘너의 결혼식’이라는 작품을 찍었다. 작품에서 내가 맡은 ‘승희’도 자칫하면 비호감으로 불릴 수 있는 인물이다. 남자 주인공인 ‘우연’의 순애보를 때로 외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희의 입장에서 보면, 우연은 과거다. 승희는 현재를 사는 인물이고,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없는 인물이다. 현재에 충실하면서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누군가가 지켜주길 바라지 않는 승희가 내 눈엔 멋져 보였다. 이 역시 내게는 없는 모습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나의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는 고민하며 가는 게 숙명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대신 ‘주진’처럼, 또 ‘승희’처럼 자기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고 더 당당한 인물이 되어가려고 한다. 배우 박보영도 인간 박보영이 행복할 때 행복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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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케이
박보영│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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