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작품이다. 장르는 액션, 의상은 검은 정장, 배역명은 중요하지 않다. 늘 VIP에 밀착해 그림자 같은 삶을 살지만 만족한다. 언제든 죽을 각오가 돼 있다. 오히려 죽음은 영예였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 모습은 2004~2013년 배우 이수련의 실제 삶이었다. 그는 청와대 1호 여성 경호관이었다.
경호관이 된 건 우연이었다. 어느 날 대통령경호실에서 ‘여성 최초 경호관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재미있어 보였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더 매력 있었다. 필기시험, 신체검사, 체력 측정, 심층면접을 거쳐 그는 최종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준비된 경호관은 아니었지만 잠재된 투지가 타올랐다. 그렇게 청와대에 입성했다.
부푼 마음은 이내 물거품이 됐다. 대통령경호실은 남성도 여성도 없었다. 경호관만 존재했다. 엄격하고 툭툭 뱉는 거친 말은 일상이었다. 그래도 어딜 가든 여성으로 대우해줬는데 쉴 새 없이 상처가 생겨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여중-여고-여대, 일명 ‘수녀 라인’을 밟아온 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꼴이었다.
죽음은 최고의 영예
죽음을 담보한 체력 훈련은 한마디로 지옥 훈련이었다. 평소 운동을 즐기는 편이었음에도 육·해·공 특수훈련은 만만치 않았다. 여가 시간이면 동료들과 군대처럼 축구, 족구, 배구를 했다. 본능을 역행하는 훈련도 이어졌다. 큰 소리가 나면 피하기보다 눈도 깜짝이지 않고 체위를 확장해야 했다. 공이 오면 헤딩으로 막아내는 훈련은 예사였다.
정작 힘든 건 감정을 누르는 생활이었다. 한번은 근무 중 휴양지에 들렀다. VIP는 이왕 왔으니 바나나보트를 타며 즐길 것을 권했다. 극구 거절하자 안전 점검을 빙자한 명령이 떨어졌다. 바나나보트에 오르니 신나게 소리 지르는 건 당연지사. ‘꺅’ 소리와 함께 선배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경호관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수행 차 재난 현장에 갈 때면 흐르는 눈물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차차 냉정해졌다. VIP 외의 장면은 의식적으로 차단했다. 주변을 동떨어진 세계로 치부하자 감정이 무뎌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호관의 모습을 갖춰갔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누구 못지않은 소명의식도 생겼다.
“사람은 모두 죽잖아요.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죽음이 어디 있겠어요? 더구나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이 나라 대표인 대통령을 지키는 건 국가 안보와도 직결되는 일이죠. 경호관끼리 ‘앞에서는 뚫려도 뒤로는 뚫리면 안 된다’고 말해요. 몸을 날려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죠.”
경호관은 죽음을 맞고서야 진정한 경호관이라고 한단다. 아웅산 테러에서 유명을 달리한 경호관들이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호 중 맞이한 죽음을 최고의 영예로 여긴다. 서울 현충원에 경호관 묘역이 한 자리 남아 있는데 경호관 사이에서 앞 다퉈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자리, 내 자리다.” 일반인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경호관의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수련 씨는 어린 시절 선천성 심장병을 앓았다. 네 살 때는 수술도 받았다. 텔레비전 자막에 ‘혈액 급구’라는 공고가 나갔고 그걸 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늘 “언제든 그런 상황이 오면 보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60차례 헌혈을 하며 헌혈유공장도 받았다. 세상에 도움이 되자는 결심이 경호관으로서 그의 소명의식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어엿한 경호관이 됐지만 그의 존재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여성 경호관이 드물던 국내는 차치하고라도 다른 나라의 경호관들도 그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그로 인해 종종 웃지 못할 일화가 생기곤 했다. 미국의 국빈팀 경호를 맡을 때였다. 미국 선발 경호팀과 사전에 상견례를 가졌다. 2m를 육박하는 키에 우람한 덩치, 방탄복을 입은 미국 경호팀 앞에 나란히 섰다. 이수련 씨가 나서 선발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믿을 수 없어(Unbelievable)” 하며 미국 경호팀의 얼굴들이 굳어졌다. 웅성웅성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닌자’라는 특별한 무술이라도 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경호관 생활은 많은 걸 변화시켰다. 이수련 씨는 지금도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 두 시간씩 운동은 필수다. 무엇보다 축구광이 됐으니, 이번 월드컵 기간도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는 경기가 있으면 24시간 헬스클럽으로 향한다. 러닝머신 위에서 중계를 보는 내내 전후반을 같이 뛴다. 연장전·승부차기라도 돌입하면 선수들과 꼬박 두 시간을 뛰는 셈이다. 헬스클럽 직원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2013년, 경호관이 된 지 꼭 10년이 됐다. 힘들어하던 과거는 지워졌다. 현재의 삶에 만족했지만 미래의 삶을 생각하자 답답했다. 대통령경호실은 명예로운 직장이자 안정적인 곳이었다. 안정은 변화를 거부할 터였다. 안정에 길들여지기 전에 더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했다. 퇴직을 결심했다. 경호관으로 힘든 훈련도 버텼는데 못할 일이 없었다. 지난 10년의 경험이 큰 자산이었다.
감정을 감췄듯, 감정을 드러내라

ⓒC영상미디어
그가 선택한 길은 배우. 퇴직금을 탈탈 털어 연기 수업에 몰두했다. 연기 선생님들은 그의 연기가 마네킹·인형 같다고 지적했다. 표정이 없다는 뜻이었다. 배우는 카메라 너머로 감정을 전달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감정을 숨기는 훈련을 해온 그는 난관에 봉착했다. 다시, 시작이었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틀을 깨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차근차근 연기 지도를 받던 어느 날,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슬픔을 연기했지만 그가 느낀 건 카타르시스였다. 그다음은 분노, 희열이었다. 그동안 숨겨온 감정이 일순 표출됐다. 연기의 ‘맛’을 본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의 장벽은 높았다. 연기의 틀은 다졌지만 서른셋 신인배우는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다. “나이가 많다”, “외모가 특출하지 않다”는 무수한 말이 상처가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에게는 사소한 의견에 불과했다. “나이에 맞는 역할을 하면 되지”, “개성파 배우도 많은걸” 하며 스스로 발상을 전환했다. 오히려 연기의 감을 익히고자 집중했다. 그 흔한 소속사도 갖지 않았다. 수차례 계약 제의가 있었지만 거절했다. 그는 “연예기획사에 들어가면 배우의 경력, 이미지를 관리하잖아요. 회사의 도움으로 시작하면 회사가 없을 때는 어떻게 일어설지 모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라고 했다. 참 그답다. 한 손에 프로필, 한 손에 음료를 들고 직접 제작사, 촬영 현장을 돌았다. 그러면서 본 오디션이 150번을 넘었다.
“만약 20대에 연기를 시작했으면 예쁜 역할만 하고 싶었을 거예요. 진짜 연기 맛을 몰랐겠죠. 그런데 내 안에 천박함, 우아함, 두려움, 순수함 등 다양한 모습이 있더라고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줬어요. 배우는 역할이란 명분이 주어지면 뭐든 꺼낼 수 있잖아요. 이런 걸 알고 연기를 시작한다는 게 30대 신인의 강점이에요.”
그는 역할의 경중을 따지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배역에 의미가 있다면 뭐든 뛰어들었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증명하고 있다. ‘갑동이’의 피해자, ‘아이가 다섯’의 매장 직원, ‘가화만사성’의 아나운서, ‘대박’의 기생, ‘푸른 바다의 전설’의 퍼스널 쇼퍼. 드라마를 봤다고 해도 출연 장면을 설명해야 ‘아!’ 하고 떠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배역의 번듯한 이름조차 없었다.
이수련 씨는 어느덧 5년 차 배우에 접어들었다. 이제 출연 회차도 늘고 조연도 맡게 됐다. 배역에도 이름이 생겼다. 최근 중국 유쿠(중국식 유튜브)에서 방영한 ‘최고의 커플’에서 주인공 이다해의 절친 신나영으로 분했다. 제법 비중 있는 역이었다. 드라마 조회 수도 10억 건을 넘는 쾌거를 거뒀다. 이외에도 방영을 앞둔 드라마 ‘하와유 브레드’, ‘프로의 탄생’, ‘사생결단 로맨스’ 등에 출연하며 부지런히 활동했다.

▶ 1 배우 이수련이 청와대 경호관 당시 미국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좌), 일본 아베 신조 총리(우)를 경호하는 모습 2 중국 드라마 ‘최고의 커플’ ⓒ이수련
액션의 진수 보여줄 것
그가 진짜 욕심내는 역할은 뭘까. 단번에 답변이 돌아왔다. 영화 ‘킹스맨’의 해리 하트(콜린 퍼스) 역. 살아 있는 액션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다는 뜻이다. 정장 입고 총을 쏘는 모습, 싱크로율 100%다. 그가 가진 강점이 제대로 부각될 것이다. 그는 짧은 등장으로 보는 이의 뇌리를 사로잡는 ‘신 스틸러’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덧붙였다.
“액션 신 섭외는 종종 있었어요. 그런데 역할보다 액션만 부각되는 게 대부분이었죠. 액션만 보여줄 생각이면 스턴트를 했을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건 제대로 된 연기에 액션이 더해진 역할이에요.”
배우에 도전장을 내민 이수련. 진지한 마음으로 전향했지만 ‘청와대 경호관’이란 수식어는 명과 암으로 존재한다. 과거 경력도 짊어지고 가야 할 부분이지만 연기를 향한 진심이 희석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는 “언젠가 ‘청와대 경호관’ 출신 배우가 아닌 온전히 ‘배우 이수련’으로 기억되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그래서 더 다양한 모습을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다. 기생, 마담, 불륜녀 같은 극단적 배역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이쯤 되니 이수련 인생의 장르가 단순 액션은 아닌 듯하다. 반전·모험·휴머니즘이 복합적으로 가미된 드라마로 정의될까. 이제 다양한 배역도 가능하니 그 영역은 더욱 넓어질 갓이다. 무명의 터널을 지나 이름 가진 배역이 늘어났다. 배우로서의 이름도 대중에게 한층 더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인사를 전한다.
“배우 이수련입니다.”
선수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