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 점검’, ‘배그 점검’. 언젠가부터 국내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목록에서 쉬이 발견되는 단어다. e스포츠 종목 ‘리그 오브 레전드’와 ‘배틀그라운드’의 서버 점검 시간을 뜻한다. 이들 검색어는 때에 따라 온종일 상위권을 유지하며 많은 사람이 해당 게임에 주목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야말로 인기 종목이다.

▶ 지난해 7월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열린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론칭 행사를 찾은 관람객들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
인기 종목 그리고 선수들
스타크래프트 붐으로 촉발된 e스포츠는 초창기만 해도 지금처럼 거대한 규모의 대회는 아니었다. PC방을 중심으로 손님이 참가하는 소규모 대회가 대다수였고 우승상품은 상금 대신 소소한 선물 형태가 전부였다. 텔레비전 생중계를 기반으로 ‘직접 하는 스포츠’에서 ‘보는 스포츠’가 가능해지면서 지금과 같이 활성화된 모습을 갖추게 됐다. 동시에 다양한 종목이 등장하는 발판이 됐다.
e스포츠의 종목 다양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신규 PC 종목과 더불어 모바일 종목 펜타스톰, 클래시로얄 등이 e스포츠 시장의 양적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아울러 VR, AR게임은 향후 e스포츠 종목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더 많은 종목의 등장이 기대를 모은다.
다만 유형과 장르에 따라 국가마다 인기 있는 종목에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북미와 유럽은 여전히 콘솔게임(TV와 전용 게임기를 연결하는 형태)이 주된 반면, 한국과 중국은 PC게임에 관심도가 높다. 우리나라는 리그 오브 레전드와 배틀그라운드 등이 대표 종목이다. 이들 두 게임이 국내 관련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롤(LOL)’이라고도 부르는 리그 오브 레전드는 MOBA(Multi-player Online Battle Arena, 여러 명이 참여하는 온라인 전투 게임) 장르의 대표 게임이다. 실시간 전략 게임(RTS)과 역할 수행 게임(RPG)을 한 게임에서 동시에 할 수 있는 게 특징. 양 팀은 고유의 플레이 유형을 자랑하는 강력한 챔피언을 소환해 다양한 모드의 전장에서 정면 대결을 펼친다. 다섯 명이 한 팀을 이뤄 대결한다는 점에서 스포츠로서 모습도 갖췄다. 2011년 국내 서비스 개시 이후 200주 이상 연속 PC방 이용 게임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등 오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가장 권위 있는 국제대회로 손꼽히는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롤드컵)’에서 5년 연속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제왕에 가까운 면모를 과시했다. 마치 올림픽의 양궁대회처럼 우리나라 예선을 통과하는 게 본선 경기보다 더 치열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기량 높은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로 2015년, 2016년 롤드컵은 우리나라 팀 간의 결승전으로 끝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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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그 오브 레전드 이상혁 선수 ⓒ한국e스포츠협회
이 종목을 대표하는 국내 선수로는 페이커 이상혁을 들 수 있다. “e스포츠는 몰라도 페이커는 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그는 2013년 데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e스포츠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가 됐다. 업계 관계자는 “이상혁 선수는 농구로 치면 마이클 조던, 축구로 치면 메시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게임 특성상 개인이 돋보이기 쉽지 않음에도 이상혁 선수는 폭넓은 챔피언 활용, 새로운 전술, 공격적인 플레이로 세계를 열광시켰다. 2016년에는 롤드컵에서 최초로 3회 우승의 기염을 토하며 글로벌 톱 플레이어임을 증명했다. 웬만한 한류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며 미국, 중국, 동남아 등에서 현지 팬클럽이 다수 운영되고 있다. 이제 국내외 팬들은 이상혁 선수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즉각 반응한다. 2017년 롤드컵 결승전에서 패배한 이 선수가 눈물을 보이자 “페이커 울지 마”라는 4만여 명 관객의 외침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장관이 연출되기도 했다. 이날 중국 포털사이트 웨이보에서는 ‘페이커의 눈물’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였다.
그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신적 존재, ‘프로게이머의 프로게이머’다. 2018 아시안게임에서 그의 출전 여부가 끊임없이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예선 참가를 위해 출국하기 앞서 “e스포츠가 게이머뿐 아니라 게임을 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점점 다가갈 수 있게 된 것 같다”며 “아시아권에 게임 강국이 많아 우승까지 어려운 과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나라가 최고의 게임 강국임을 증명하고 싶다”고 밝혔다.
롤·배그 국내 시장 양분… 스타Ⅱ도 인기
LOL을 잇는 차기 e스포츠 종목으로 떠오르는 게임은 단연 배틀그라운드다. 최대 100명의 이용자가 외딴 지역에 떨어진 각종 무기와 차량 등을 활용해 최후의 1인 또는 1팀이 살아남을 때까지 생존싸움을 벌이는 게임이다. 원초적 생존본능을 자극한다는 점이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배틀그라운드는 지난해 3월 PC 플랫폼 스팀에서 유료 테스트 버전으로 출시된 지 13주 만에 누적 매출 1억 달러를 기록하며 전 세계적인 게임으로 거듭났다. 영원한 1위일 것 같았던 롤을 끌어내리고 PC방 점유율 1위에 오른 적도 있다.
구단(게임단)들 또한 이 게임의 성장성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017년 이스포츠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구단 중 70%가 주목하고 있는 게임으로 배틀그라운드를 지목했다. 국내 게임단이 프로선수 모집을 시작한 데 이어 최근 북미 프로게임단 Cloud 9은 국내 배틀그라운드 선수들로 구성된 프로팀을 발족했다.
배틀그라운드 선수로는 에스카 김인재가 있다. 김인재 선수는 지난해 말 오버워치에서 배틀그라운드로 종목 전향을 선언했다. 그는 이미 스페셜포스, 스페셜포스Ⅱ, 블랙스쿼드, 오버워치 등 4개 종목에서 정상에 오른 선수다. Gen.G Gold팀 리더인 그는 뛰어난 사격 실력이 강점이며, 교전 상황에서 1 대 다수를 상대하는 능력이 상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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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성주 선수 ⓒ진에어 그린윙스 누리집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된 선수들의 활약도 기대할 만하다. 스타크래프트Ⅱ 종목 조성주 선수는 지난달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최종 우승을 거머쥐며 아시안게임 출전을 확정지었다. 예선만 통과하면 우리나라 최초 스타Ⅱ 국가대표로 아시안게임 무대에 오르게 된다. 그는 엄청난 경력을 자랑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2013년부터 꾸준히 우승 트로피를 획득했고 최근 들어 그 기세가 더욱 매섭다. 스타Ⅱ 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대회를 모두 우승해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다. 또 2018 글로벌 스타그래프트Ⅱ 리그(GSL) 시즌 2에서 8강에 가장 먼저 진출하는 등 유력한 메달 후보로 점쳐지고 있다. 클래시로얄 종목 선수 황신웅 역시 글로벌 무대에서 검증된 실력자다. 앞서 그는 지난해 크라운 챔피언십 글로벌 시리즈 코리아에서 우승했다.
선수 권익 증대 위한 뒷받침 필요
김철학 한국e스포츠협회 사무총장 대행은 한국 선수들의 월등한 실력에 대해 “그만한 연습량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2017년 이스포츠 실태조사’ 보고서 결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프로선수들은 연습시간을 묻는 질문에 주중에는 평균 12.8시간, 주말에는 평균 12.6시간을 훈련한다고 응답했다. 주중에 13시간 이상 훈련하는 선수는 50.7%로 집계됐다.
여느 스포츠 종목도 그렇겠지만 특히 e스포츠 생태계에서 선수는 중요한 축이다. 경기가 아닌, 선수와 관련한 콘텐츠가 비즈니스 모델로 각광받기 때문이다. 이상혁 선수가 보여주듯 e스포츠 선수는 스포츠 속성과 동시에 엔터테인먼트 요소도 갖추고 있어 부가 콘텐츠 생성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선수가 경기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전략과 판단은 그 게임을 즐기는 세대에 신선한 영감을 준다. 실제로 경기를 관람하고 선수를 응원하며 그 과정에서 받은 감동을 온·오프라인상에서 공유하는 현상은 새로운 팬덤 문화로 정착하고 있다.
전 프로게이머 조형근은 저서 에서 “선수들은 대회에 출전하는 것과 동시에 스트리밍(개인방송)을 통해서도 게임을 하고 팬들과 소통한다”며 “팬들은 선수들의 개인 화면과 게임 외적인 모습을 보기 위해 스트리밍을 시청하고 선수들에게 후원금을 보낸다”고 말했다.
국내 선수들의 글로벌 입지가 넓어지면서 이들의 권익 증대를 위한 노력이 필요해졌다. ‘2017년 이스포츠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많은 e스포츠 프로선수들이 손목 부상 등 직업병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선수 생활이 단축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에 한국e스포츠협회는 지난해 4월 재활솔루션업체 AIDER(에이더)와 e스포츠 선수용 보호장비 개발에 대한 상호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격렬한 경기에도 무리 없는 ‘e스포츠 선수용 손목보호대’ 경량화 제품이 출시됐다.
방송 플랫폼 트위치 TV와 선수의 윈윈 사례도 있다. 트위치 TV는 지난해 3월 스타크래프트Ⅱ 선수들과 스트리밍 계약을 체결, 거취를 고민하던 많은 선수들이 개인방송으로 새로운 도전에 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계약을 맺은 선수들에게 팬들의 도네이션뿐만 아니라 일정 방송 시간을 채웠을 때 받을 수 있는 금액 등 다양한 옵션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수들의 업적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장, ‘e스포츠 명예의 전당’도 생겼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운영하는 이곳은 e스포츠 역사를 조명하고 선수들의 발자취를 전시, e스포츠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드높인다.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