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사나이’에 출연했던 게 2014년이다. 뛰고 구르고 버틴 게 전부였던 거 같은데, 그 후로 많은 게 달라졌다. 먼저 내무반에 붙어 있던 포스터가 에이핑크에서 걸스데이로 바뀌었다. 그 정도도 감사하다고 생각했는데, 더 큰일이 일어났다. ‘응답하라 1988’의 덕선이를 만나게 됐다. 당시 작품을 준비하던 신원호 PD가 우연히 ‘진짜 사나이’를 본 게 계기였다. 그 우연이 나를 ‘응답하라’ 현장으로 데려다주었다. 연기를 배운 적이 없어서, 내게는 현장이 배움의 장이었다.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는 법, 그가 살아온 삶을 상상해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선배들의 이야기가 큰 힘이 됐다. 특히 아빠였던 성동일 선배는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중 하나가 “언젠가는 꼭 영화를 해봐라”는 당부였다. 그 당부는 오래오래 내 마음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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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물괴’ 중 ⓒ롯데엔터테인먼트
이후로도 여러 작품을 만났다. 드라마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덕선이’를 극복하는 것도,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이미지를 잊게 만드는 것도 내 몫이었다. 드라마를 연달아 찍고 나서, 나는 1년을 쉬었다. 많은 게 고갈된 느낌이었다. 다시 나 자신을 찾고 싶었다. 그때 ‘물괴’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영화 시나리오가 온 것도 신기했지만, ‘물괴’에서 명이의 역할이 신선했다. 명이는 조선에 나타난 기이한 괴물 ‘물괴’를 찾는 수색단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낸다. 위험할 때는 활을 쏘아 적을 물리치고, 희생자들의 시신을 보면서 물괴의 정체를 짐작한다. 영화엔 나오지 않지만, 쓰러진 동료를 함께 북돋아 인왕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장면도 있다. 명이의 나이는 고작 열일곱, 내가 데뷔하던 때와 같은 나이다. 데뷔 10년 후 만난 명이는, 그때의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나는 금세 명이가 좋아졌다.
영화 현장은 드라마와 많이 달랐다. 인물에 깊이 들어가 볼 수 있는 시간이 넉넉히 확보됐다. 나는 산속에 있는 명이의 초막을 보면서 명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산속에서 풀죽을 먹고, 사냥을 하고, 심심하면 책을 읽었던 명이는 아마 검게 그을린 얼굴에 긴 댕기머리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낡은 한복을 입고, 긴 머리를 땋고 현장에 서니 명이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김명민 선배는 나를 보고 처음엔 몰라봤다고, 너무 땟국물이 줄줄 흘러서 놀랐다고 했다. 사실 나는 편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되는 현장이었다. 다만 선배들에게 집중했다. 사극은 처음이기 때문에, 사극 경험이 많은 선배들과 대본 리딩을 하는 게 내게는 큰 공부였다. 생각해보면 이 시간은 내게 터닝 포인트였다. 다시 신인의 마음이었다.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영화 현장에 가보는 것도, 사극을 하는 것도, 액션을 보여주는 것도, 또 내가 연기하는 모습이 커다란 스크린에 나오는 걸 보는 것도 말이다. 인생의 1막과 2막이 있다면 2막이 열리는 느낌이었다.
명이는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기 앞길을 헤쳐 나가는 인물이다. 자기의 삶에서 시대를 읽을 줄 아는 지혜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명이가 사내들 사이에서 민폐를 끼치는 인물이었다면, 나는 ‘물괴’의 명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달리면서 자기감정에 솔직한 명이는 다시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명이의 처음과 끝을 알고 나니, 연기의 지평도 넓어진 것 같았다. 인물을 펼쳐 보인다는 게 어떤 말인지 알 게 되었다. 처음에는 명이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상상해보는 게 막막했는데, 갈수록 명이의 삶이 입체적으로 채워졌다. ‘물괴’를 마치고 만난 다음 작품에서는 그 작업이 훨씬 수월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든 나는 명이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덕선이가 그랬듯, 명이는 내게 또 다른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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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리│가수 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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