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여름이었다. 전 세계가 올림픽의 환희에 젖어 있던 그때, 나는 뉴욕에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면 뉴욕에 머무르며 여러 발레 스튜디오에 있는 선생님을 만나 수업을 받았다. 그해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였다. 스튜디오에서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만나기로 했던 선생님 대신 다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 제타 콘스탄티네스쿠. 그녀는 원래 오기로 했던 선생님이 아파서 대신 나를 가르치러 왔다며 인사를 건넸다. 일생일대의 만남이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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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이 끝난 뒤 무대 뒤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제타 콘스탄티네스쿠와 문훈숙 ⓒ유니버설발레단
제타의 가르침은 특별했다. 그는 나에게 발레의 테크닉뿐 아니라 자신감을 심어준 사람이다. 제타 선생님을 만났을 무렵 나는 이미 프로 발레리나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다.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서양인들 틈에 있어서인지 춤에 확신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위축돼 있었다. 제타는 내게 “너는 할 수 있어. 네게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특별함이 있어”라며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그는 많은 것을 알려줬다. 춤을 출 때 어떻게 움직여야 어깨나 골반이 바르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점프를 해야 더 움직임이 좋아지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술을 삶에 녹이는 방법도 알려줬다. 발레는 춤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때문에 많은 무용수가 기술적인 부분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춤의 기술을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예술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제타는 이 모든 것의 기반이 호흡이라고 말했다. 요가와 호흡을 통해 춤 속에 나 자신을 녹여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 물론 처음에는 그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호흡만으로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의 조언을 따라 호흡하는 법을 열심히 익혔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무엇인가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단 음악이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들렸다. 음악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하니 춤도 달라졌다. 나 혼자서는 넘을 수 없었던 차원의 문을 넘어 새로운 감각이 생긴 기분이었다. 음악과 춤을 받아들이니 발레가 더 재미있어졌다.
제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밥을 먹을 때, 이동할 때, 공연이 끝난 후 로비에서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89년 러시아 키로프발레단에서 동양인 최초로 ‘지젤’ 역을 맡았을 때도 제타는 내 곁에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부담감은 상당했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보니 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럴 때도 그는 늘 그랬듯 “너는 특별하다, 할 수 있다”는 말로 내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지젤 공연도 할 수 없었을 거다.
제타를 보며 나 역시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유니버설발레단 단장을 맡으면서 단원들과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에 힘썼다. 단원들을 가르치면서 늘 제타를 떠올렸다. 제타가 내게 보여줬던 모습 그대로를 전해주고 싶었다. 연습이 끝나고 나면 발을 마사지해주던 모습, 연습이 잘 안 되던 날 공원으로 데리고 가서 달래주던 모습. ‘가르쳐야 하는 학생’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했던 제타의 가르침은 내게 삶의 지침으로 남았다.
지난해 제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의 선생님이자 자매였고 친구이자 엄마였던 제타. 그가 전해준 가르침과 사랑은 오래도록 내 안에서 숨 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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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훈숙│유니버설발레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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