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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가 평생의 업인 줄 알았다. 피아노 전공으로 러시아 유학을 다녀온 후 강습을 하며 피아노와 함께한 세월이 36년이었으니. 하지만 보이스피싱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당장의 생계가 문제였다. 기존의 생활 방식으로는 미래가 불투명했다. 그때 무심코 던진 지인의 말이 채신혜 씨의 삶을 180도 뒤집어놓았다. “용접을 배워봐요. 용접사는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데.”
“용접이 뭔데요?”라고 되물을 만큼 아무것도 몰랐지만 먹고살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한국폴리텍대학에서 용접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입학을 기다리는 동안 도움이 될까 싶어 지게차, 굴삭기 면허도 취득했다. 결국 건반을 누르던 손가락으로 용접용 토치를 쥐었다. 아름답던 피아노 선율은 쨍한 기계음이 됐다.
화상에도 불구하고 다시 든 용접 토치
뜻밖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를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10~20세 차이 나는 어린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을 들었다. 곧 현장에 나가 일할 수 있다는 기대도 날로 커졌다. 비극은 희망 속에 싹트는 것일까. 수업 중 흘러내린 녹물이 몸을 덮친 사고로 하반신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모두 그가 용접을 그만둘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채 씨는 다시 토치를 잡았다.
물론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통증보다 힘든 건 평생 지워지지 않는 가슴속 흉터였다. 불만 봐도 흠칫 놀랐다. 이제 겨우 용접과 친해지던 차에 트라우마가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사고를 극복해내고 마침내 학교를 졸업했다. 어엿한 용접기능사가 된 채 씨는 현장에서의 기본적인 안전사항을 반드시 지킨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시련 뒤 더욱 단단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어려운 세계였다. 동료 모두가 남성인 세계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내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같은 일을 해도 급여가 20~30% 적은 데다 기회가 잘 주어지지도 않았다. 분명 잘할 수 있는데 손을 내미는 곳이 없었다. 용접 작업을 할 때는 무거운 자재를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해 강인한 체력도 필요했다. “여자가 얼마나 힘을 쓰겠냐”는 비아냥은 깊은 곳의 독기를 끌어올렸다. 악착같이 버텨내 이제 용접사가 된 지 5년째다.
5년 전과 달리 지금은 일한 만큼 보수도 받고 대우도 받는다. 얕잡아 보는 시선도 느껴지지 않는다. 채 씨만의 강점도 있다. 용접사가 되기 전에 취득한 지게차, 굴삭기 자격증을 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용접 업무의 특성상 현장에서 장비나 차량을 운전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배관·탱크를 개·보수하며 용접 토치를 들고 있자니 수없이 싸워왔던 시간이 스쳐간다. 불꽃은 그에게 제2의 인생을 선물했다. 용접을 하고 있으면 오로지 불꽃에 집중할 수 있다. 피아노와 함께한 삶도 즐거웠지만 이제 그는 불꽃에 온전히 매료됐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용접사를 할 거냐고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선수현 | 위클리 공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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