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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엠아트
비가 참 많이도 내렸다. 평소였다면 운치 있는 날씨라고 설레기도 했을 법한데, 더한 긴장감만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앉은 곳은 피아노 앞이 아닌 하프시코드 앞이었으니까. 매번 피아니스트로서 자리하던 그곳에서 그날의 나는 생애 첫 하프시코드 연주가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오랜 로망을 실현하는 순간은 강렬하게 추억된다. 내게 2015년 여름 평창대관령음악제가 그런 존재다. 2011년을 시작으로 한 해를 제외하곤 매년 평창대관령음악제 무대에 올랐다. ‘가족 같은 축제’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친숙하게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2015년 그날은 여느 때와 달랐다. 엄청난 도전의 기회가 주어진 매우 특별한 날이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이 도전의 시작이었다. 그 제안에 대해 ‘하프시코드로 연주할 수 없다면 하지 않겠다’는 게 내 답변이었다. 하프시코드는 피아노의 먼 조상쯤 되는 악기다. 대충 보면 피아노 생김새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표현되는 음색은 분명히 다르다. 피아노의 격정, 강렬함과 같은 셈여림은 전달할 수 없어 연주자에게 허용된 표현의 폭이 좁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하프시코드를 고집한 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하프시코드로 연주됐던 터라 ‘언젠가 한 번 그대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꿈을 꿔왔기 때문이다.
워낙 생소한 악기였기에 내 꿈이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정말 감사하게도 관계자 분들은 내게 하프시코드 연주 기회를 만들어주셨다. 덕분에 피아노에 익숙해진 손가락을 하프시코드 건반 위에 올렸던 그때의 느낌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남아 있다. 가슴 벅참, 압박감 그리고 기대감.
그날 무대 위 나는 유독 긴 심호흡을 내뱉었던 것 같다. 하프시코드 연주를 공식적으로 보여주는 첫 무대이기도 했지만 습도에 취약한 악기라는 점도 한몫했다. 건반이 탁탁대는 소리에 마음 졸이며 마치 신생아 다루듯 조심스럽게 연주해야 했다. 결코 쉽지 않았던 과정이라서 그랬을까. 한 시간 남짓한 연주를 마쳤을 때 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잘 마쳤다는 뿌듯함에 후련함까지 더해졌다. 와! 내 꿈을 이렇게 이룰 줄이야. 그래서 평창대관령음악제에 더 큰 애착을 갖는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평창대관령음악제는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그중에서도 강원도 사람들로 하여금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양질의 통로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랄 때만 해도 강원도는 문화의 불모지였다. 각종 공연이나 전시회는 말할 것도 없고 음악회 개최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대관령음악제가 생긴 이후로는 대도시와 비교했을 때 느끼는 문화적 소외감이 크게 줄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강원도민으로서, 하프시코드 연주가로서 도움을 받았던 내가 이제는 제3대 평창대관령음악제 예술감독으로 축제의 조력자가 되려 한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난 지금 평창대관령음악제는 제2의 도약을 앞두고 있다. ‘강원도 평창’ 하면 고개를 갸우뚱했던 외국인들이 ‘올림픽 사이트(Olympic cite)’를 이야기할 정도다. 더 많은 사람이 클래식 음악에 가까이 다가와 멋진 음악과 교류함으로써 영혼에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음악제를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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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열음│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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