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심취한 분야와 직업이 일치하는 경우를 가리켜 요샛말로 ‘덕업일치(덕후의 덕과 직업의 업의 합성어)’라고 한다. 이모티콘 붐이 일자 덕업일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누구나 이모티콘을 생산할 수 있는 플랫폼이 생기면서 평소 낙서를 즐기던 이들은 그것을 업으로 삼게 됐다.
대충 하는 답장, 이모티콘으로 대신하면 그뤠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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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범고래) 이모티콘 작가
성의 없는 답장은 분명 불쾌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대놓고 대충 하는 답장이라고 하는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마치 붕어빵 틀로 찍어낸 듯 일정한 얼굴 모양에 서툰 솜씨로 그려진 것 같은 표정이 전하는 메시지는 참으로 강렬하다. 이모티콘 작가 김규진(범고래) 씨는 말 그대로 ‘대충 하는 답장’을 그려낸다.
“친구들과 스마트폰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의미 없이 대화를 툭툭 던질 때가 많습니다. 메시지로 채팅방을 도배한다거나 ‘왜’, ‘뭐’처럼 단답형 문자로 상대방을 약 올려요. 일부러 무성의하게 답하는 건데 문자로만 전하려 하니 그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더라고요. 기존 이모티콘으로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어요.”
선으로 툭툭 그린 몸체에 아주 조금씩 변형된 이목구비. 정말 별것 없어 보이는 이모티콘 같지만 미세한 감정 표현을 해낸다. 두세 개의 자음 문자열로 구성된 답장을 받았을 때와는 또 다른 뉘앙스다. 무심한 듯 또는 비꼬는 듯한 표정과 함께 받는 단답형 메시지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김규진 씨의 의도는 통했다. 김 씨의 이모티콘은 2017년 7월 출시 직후 인기 순위 1위에 오른 데 이어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더 재미있는 건 김 씨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거나 그려본 적 없는, 단지 낙서를 좋아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작가로 전향한 지 이제 5개월. 김 씨가 만든 이모티콘은 ‘대충 하는 답장’과 ‘정성스런 답장’ 두 가지다. 정성스런 답장은 대충 하는 답장의 움직임 버전이다. 그림 자체의 정교함이나 화려한 움직임을 자랑하는 기존 이모티콘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메시지 대신 이모티콘을 보냈을 때, 메시지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의미 전부를 전달할 수 있는 실용성에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 씨에게 그의 이모티콘 적재적소 활용법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무안한 상황을 재치 있게 벗어나고 싶을 때 사용해보세요. 가령 맘에 들지 않는 이성이 끊임없이 연락을 해오는 경우요.”
즐겁고 행복한 이모티콘 세상 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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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윤화(펀피) 크리에이터
서울 모처에 위치한 33㎡ 규모의 작은 사무실에는 알록달록 귀여운 캐릭터 모형이 가득하다. ‘어느 여성이 만들었으리라’ 단정 짓는 순간, 명함을 건넨 남성의 모습에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깨닫는다. 강아지와 고양이, 토끼, 판다 등 작고 정교한 동물 캐릭터 모두 이 남자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크리에이터이자 이모티콘 작가 백윤화(펀피) 씨다. 백윤화 씨의 또 다른 이름 펀피(Funppy, Fun+Happy)는 ‘즐겁고 행복하자’는 그의 작업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펀피 스튜디오를 운영하기 전까지 국내 포털 기업에서 9년 동안 디자이너로 일했어요. 그러다 일본지사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일본 캐릭터 산업을 보면서 문화적 자극을 받았어요. 평소 끼적여왔던 낙서 같은 그림도 캐릭터가 될 수 있더라고요.”
퇴근 이후에는 인근 카페에서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다. 시기적으로 맞물렸다. 당시 회사에서 스마트폰 메신저 론칭을 준비하면서 그에게도 캐릭터 제작 기회가 생겼다. 그때 만든 첫 캐릭터 ‘모찌’는 세계 판매 순위에서 상위권에 올랐고, 캐릭터 크리에이터로의 전업을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에 메시지를 더한 이모티콘을 생산하고 있다.
“가끔 지하철에서 제가 만든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정말 감사해요. 크리에이터로 전향한 뒤 처음 선보인 게 ‘똥’ 캐릭터였는데, 한마디로 망했거든요. 예쁜 이미지로만 승부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됐죠.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아이디어가 필요했어요. 그때 경험을 발판 삼아 내놓은 이모티콘들이 큰 호응을 얻는 모습을 보면 짜릿하기까지 해요.”
이모티콘 판매 순위로만 따지면 백 씨는 꽤 탄탄한 입지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늘 연구하고 긴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디바이스가 진화하면서 이모티콘의 형태도 변화가 요구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현재 이모티콘 시장은 전문적인 그리기 기술 없이도 아이디어로 경쟁할 수 있지만, 분명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가 액션콘(화면 전체를 채우는 이모티콘)이나 연속티콘(여러 개가 연결되는 이모티콘)과 같이 기존 이모티콘에 변화를 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최종 목표는 ‘디지털 놀이동산 만들기’다.
“공간 제약이 없는 디지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캐릭터와 이야기를 모아 행복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문화를 조성하고 싶어요. 제 캐릭터들은 그때까지 함께 가야 하는 친구 같은 존재예요.”
이근하│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