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끔한 제복 차림에 베레모를 쓴 여성이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거리를 정신없이 오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조용히 시선을 던진다. 자세히 보니 팔뚝엔 영문으로 ‘Tourist Police’가 새겨진 휘장을, 옷깃엔 노란색 배지를 달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관광 안내와 통역 서비스, 관광 불편 사항을 처리하는 관광경찰대 명동센터장인 이미경(43) 경위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국내 주요 관광지에 배치돼 다양한 관광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이 관광경찰이다. 외국인을 상대하는 일인 만큼 외국어 실력은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 이 경위가 달고 있는 노란색 배지는 중국어 통역이 가능하다는 뜻. 영어는 파란색, 일본어는 빨간색 배지다.
세밑을 코앞에 둔 12월 19일 오후. 이 경위와 함께 5분 동안 명동지하쇼핑센터 출구 바로 옆에 위치한 관광경찰대 명동센터 앞을 지켜봤다. 그사이 관광객으로 보이는 외국인 50여 명이 명동 거리를 지나갔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눈에 띄게 달라진 것은 명동 거리를 오가는 외국인 관광객 수가 평소보다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평소 하루 100여 건의 민원을 처리하던 것이 연말이면 거의 2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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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경위는 지난 3년간 거리에서 연말을 맞았다. 그는 “관광경찰은 외국인 관광객의 첫 번째 친구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이 경위는 "최근 한국에서 연말을 보내는 외국인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외국인들의 관광을 최일선에서 책임지는 것이 관광경찰입니다. 국내 관광지 사정을 누구보다 훤히 꿰뚫고 있어야 하는 데다 외국인의 요구 사항 역시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죠. 길을 찾거나 환불을 거절당하는 사소한 일부터 소매치기에게 현금을 뺏기거나 택시에 소지품을 두고 내리는 일까지, 도움을 요청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한국에서 연말 보내는 외국인 관광객 늘어
항시 사건·사고 대비, 긴장의 끈 놓을 수 없어
이 경위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법과 사회를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찰을 꿈꾸게 됐다. 1995년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서울강남경찰서 생활질서계(당시 방범지도계)로 발령받았고 이후 17년간 일반 경찰로 지냈다. 그러다 2011년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학창 시절 영어 교사를 꿈꿀 만큼 외국어를 잘했던 이 경위는 같이 경찰로 근무하는 남편에게 "딱 2년만 중국어를 배우고 오겠다"고 약속한 뒤 어린 딸을 데리고 중국으로 떠났다. 2013년 여름, 영어에 이어 중국어를 정복한 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땐 국내 첫 관광경찰을 선발하는 공모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공모를 확인하자마자 ‘아,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복을 입은 경찰의 위풍당당함에 반한 이후 17년간 우리 국민들을 위해 봉사했으니 이제는 어학 능력을 발휘해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을 위해 봉사할 차례라고 판단했죠. 해외에서 공부하는 저를 위해 2년 넘게 성심성의껏 외조해준 남편에게 보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고요."
관광경찰은 지원자를 받아 외국어 능력, 신체검사, 면접 등을 통해 선발한다. 중국어 담당 관광경찰에 응시한 이 경위는 지난해까지 동대문센터와 홍대센터에서 근무했다. 두 곳 모두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지역이다. 그는 "홍대센터에서 근무할 당시 중국인 여성 관광객의 지갑을 찾아준 일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중국인 여성 관광객 네 명이 신촌역에서 택시를 타고 홍대역에서 내렸는데, 그중 한 명이 지갑을 놓고 내렸다며 찾아달라고 요청했어요. 지갑에는 여권뿐 아니라 현금 등 귀중품이 들어 있었죠. 그런데 이들이 택시비를 현금으로 지불해 택시를 추적할 단서가 없었어요."
이 경위는 궁여지책으로 홍대에 설치된 방범CCTV와 인근 상점에 달린 CCTV를 모두 확인했다. 택시 차량번호를 확인한 후 서울 서대문구청에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 택시기사와 겨우 연락이 닿았다. 이 경위가 중국인 여성 관광객에게 지갑을 전달했을 땐 이미 퇴근시간인 저녁 9시 30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중국인 관광객들이 어찌나 지극히 감사 표시를 하던지요. 오히려 제가 감동을 받았습니다."
외국인 관광객과 내국인 상인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관광경찰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순발력 있게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불편 사항을 처리하는 것이다. 경험에서 쌓인 나름대로의 기준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이 경위는 "무엇보다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시간과 돈을 들여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이 간혹 국내 상인들의 말투나 행동에 마음이 상했다고 하소연할 때가 있어요. 자신이 존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럴 땐 외국인 관광객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문화나 정서 차이에서 오는 다름을 잘 설명해줘요. 그러면 대부분은 오해를 풀고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거리에서 연말 보내고 가족과 시간 못 보내지만
외국인의 안전한 관광 돕는 파수꾼이라 생각
이 경위의 휴대전화에 설치된 누리소통망(SNS) 친구 목록에는 바다와 대륙을 건너 저 멀리 사는 외국인 친구 30여 명이 있다. 지난 3년간 관광경찰로 근무하면서 인연을 맺은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의 첫 번째 친구’라는 관광경찰의 슬로건을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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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관광객의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주고 환전하는 걸 도와줬더니 SNS로 ‘친구 신청’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가끔 제가 현지 상황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 질문하면 답장이 곧바로 와요. 연말이면 안부 인사도 주고받고요. 관광경찰에 지원하지 않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죠."
이 경위는 올해도 명동 거리에서 연말을 보낼 예정이다. 그는 "남편도 경찰로 근무하고 있어 가족이 연말에 다 같이 시간을 보내기가 어렵다. 딸의 입장에선 서운할 만도 한데 ‘나도 관광경찰이 되겠다’고 말한다"며 웃었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습니다. 한국을 대표해 외국인 관광객을 만나는 만큼 대외적으로 역할의 중요성도 무척 크고요. 연말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외국인 관광객의 첫 번째 친구’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들뜬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글·김건희(위클리 공감 기자)/ 사진·홍태식 기자 2016.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