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하고 심플했다. 보온성 좋은 본딩 원단으로 만든 슬랙스 팬츠, 부드럽고 두께감이 적당해 간절기뿐 아니라 겨울까지도 입을 수 있는 울 혼방 모직으로 만든 아우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주름 잡힌 울 원단의 플리츠스커트까지 옷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경기 용인시의 작은 옷가게. 이곳에 문패를 단 와이앤수는 인터넷 의류 쇼핑몰 사무실이자 오프라인 의류 매장이다. 이곳에 둥지를 튼 지 6개월이 된 양수(42) 씨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템으로만 구성했더니 이런 스타일이 완성됐다"며 웃었다.
그가 운영하는 옷가게엔 없는 게 많다. 알록달록한 간판이 없고, 화려한 인테리어가 없고, 디스플레이용 마네킹이 없다. 그의 온라인 쇼핑몰에도 이렇다 할 이벤트가 없다. 양 씨는 "고객들이 오로지 옷만 보고 옷을 사는 쇼핑몰과 가게를 운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화려하고 잘나가는 쇼핑몰 따라 이벤트에 치중하다 보면 옷이라는 본질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고객이 행사가 아닌 정말 옷에 반해 사가도록 하는 거죠."
그렇다고 이벤트를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옷 구입 여부와 관계없이 온라인 쇼핑몰에 회원 가입을 한 모든 고객에게 1만 원 상당의 레깅스와 같은 사은품을 발송한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택배에 고객들은 감동한다고 한다.
"올해 6월 오픈한 이후 지금까지 6000여 명의 고객이 회원 가입을 했어요. 특별한 프로모션은 없지만 오픈 5개월부터 수익을 냈습니다. 현재 월 수익이 300만 원 정도 돼요."
대학 졸업 후 결혼, 19년간 전업주부 생활
마흔 넘겨 시작한 사업… 상인들 푸대접에 오기 발동
양씨는 어린 시절부터 옷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해서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한 것도 취미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그러다 졸업과 동시에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19년을 전업주부로만 살았다.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던 지난 19년의 삶, 그것도 나름 행복했다. 그러다 마흔둘이 되고 남은 인생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보게 되던 때,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다가 빨간불 신호에 걸려 차를 멈췄다. 우연히 고개를 돌려 옆 차 운전석을 봤다. 직장인으로 보이는 40대 여성이 신호 대기 중에 정신없이 화장을 하고 있었다.
"일 분도 안 되는 시간에 화장을 후딱 마치는데, 저사람에겐 자신을 꾸미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니겠지, 시간을 더 투자해 몰입할 일이 있겠지 싶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도 제가 잘할 수 있는, 뭔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 싶었어요. 저는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옷을 구경하고 입어볼 때 그렇게 좋더라고요. 인터넷에서 옷을 한번 팔아볼까 싶었죠.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생산적인 일에 몰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어요."
올봄, 바람도 쐴 겸 경기IT새로일하기센터가 마련한 ‘쇼핑몰 마스터 양성과정’에 등록했다. 그런데 수업을 위해 진짜 의류 쇼핑몰을 차려야 했다.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양 씨는 남편에게 그동안 주부로서 일했던 퇴직금을 미리 당겨 받아 사업자금을 마련했다.

▶양수 씨는 “처음 시작한 사회생활이 고단하지만 비로소 인생을 사는 방법을 터득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준비 과정은 힘들었다. 취미로 동대문 새벽시장에 가서 옷을 구경할 땐 하나같이 친절하게 대하던 상인들이 물건을 사러 왔다고 하자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줌마, 초짜한테는 물건 안 줘." 자꾸만 푸대접을 받으니 속으론 왜 사서 고생을 하나 싶어 당장 그만둬야지 했다. 그즈음 기 센 동대문 상인의 한마디. "그런다고 집으로 돌아가버리면 평생 옷 못 팔아. 시장 못 뚫어놓고 어디 가서 옷 좀 팔았단 소리 하면 안 돼."
속내를 들킨 것 같았다. 지고 싶지 않았다. 3개월간 동대문 새벽시장을 돌아다니며, 상인들한테 눈도장을 찍었다. 어느 날 남들은 쳐다보지 않는데 그의 눈을 사로잡는 스커트가 있었다. 장식은 없지만 원단이 좋아 절로 라인이 잡히는 옷이었다. 양 씨가 그 옷을 보겠다고 했더니 상인이 말했다.
"옷 좀 볼 줄 아네."
"원단으로 승부를 보는 옷의 장점은 입었을 때 고급스럽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되 원단이 좋으면서도 가성비를 내세울 수 있는 아이템을 골랐어요."
시행착오는 생활의 지혜 터득해가는 일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제대로 하고파
차츰 일에 재미가 들렸다. 하지만 한 고비 넘으니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쇼핑몰을 알리고 고객을 확보하는 방법, 마케팅이었다.
"저와 계약한 광고대행사가 있어요. 100만 원가량 받고 인터넷 포털 누리집에 우리 의류 쇼핑몰을 노출해주는 거죠. 저한텐 큰돈인데, 광고대행사에선 그 정도 금액의 고객은 있으나마나한 거예요. 그런 광고대행사 담당자한테 우리 쇼핑몰을 신경 써달라고 애원하듯 부탁해야 한다는 게 납득이 안 가고 속상했어요."

▶양수 씨는 “사업의 기본도 모른 채 의류 사업을 시작했지만 일단 시작하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해결방법을 찾게 된다”고 했다.
이제껏 사회생활을 안 해봤던 그로선 처음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시행착오를 겪는다는 건 삶을 터득해가는 일이다. 양 씨는 "19년 만에 처음 일을 하면서 비로소 생활의 지혜, 머리가 트여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했다.
"저는 남들이 사람들과 부딪혀 갈등하고 해결을 모색할 때 집 안에만 있었어요. 유예됐던 사회생활 훈련을 이제야 받으니 고객의 요구를 맞추는 일, 원하는 주문 사항을 담당자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일, 돈 버는 고됨과 보람, 내가 하는 일이 사회를 이룬다는 의미를 터득하고 있는 거죠."
일을 하고 나선 삶이 달라졌다. 특히 집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 번도 가족과 대화가 안 된다고 느낀 적은 없지만, 말하기 힘든 답답함이 있었다.
"집에서만 지낼 땐 남편과 아이들이 직장과 학교에서 지쳐서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씻고 밥 먹어라’, ‘게임하지 말고 숙제해라’ 하고 말하곤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가족한텐 잔소리였던 거죠. 그걸 지금껏 이해하지 못했는데 일을 해보니까 스트레스가 된다는 걸 비로소 알겠더라고요."
그는 조만간 회원 수가 2만여 명에 달하면 옷을 자체 제작해볼 참이다. 19년 만에 전공을 살려 의상을 디자인하는 게 꿈이다.
"성공한 여성 CEO가 되기보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도록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요. 시행착오를 겪고 있으니 언젠간 자리를 잡을 수 있겠죠."
글· 김건희 (위클리 공감 기자)/ 사진· 박해윤기자 2016.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