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대 배우다. 처음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무대를 통해서였다. 중학교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틀어준 ‘맨 오브 라만차(Man of La Mancha)’를 봤다. 뮤지컬 넘버 중 ‘이룰 수 없는 꿈’이 나왔다. “희망조차 없고 이룰 수 없는 꿈일지라도 멈추지 않고 주어진 길을 가겠다”는 부분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꿈이 없던 나에게 꿈이 생겼다. 예술고등학교를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런 이유다.
무대 배우가 되리라는 생각으로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데뷔는 뜻밖의 기회에 찾아왔다. 교수님 제안으로 ‘춘향뎐’ 오디션을 보게 됐다. 되리라는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편안하게 봤다. 그런데 주인공이 됐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작업은 영광스러웠지만, 영화는 나에게 맞지 않는 옷 같았다. 무대에서는 공연이 시작되면 끝까지 가야 한다. ‘춘향뎐’을 하기 전까진 한 편의 작품을 컷으로 나누는 영화가 거짓말 같았다. 연기도 쉽지 않았다. 카메라를 의식하다 보니 동선 자체가 어색해졌다. 하지만 오기가 생겼다. 잘 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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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와니와 준하'의 장면들 ⓒ조승우
그렇게 데뷔작을 마치고, 나는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영화 쪽에서 캐스팅 제의가 오지 않기도 했고, 영화가 내게 맞지 않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다 ‘와니와 준하’의 김용균 감독님을 만났다. 김용균 감독님은 제작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와니와 준하’의 영민으로 캐스팅했다. 감독님과 따로 만나 대본을 읽고 또 읽었다. 영화 현장이 처음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영민은 원래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다. 내가 캐스팅되면서 너무 평범하지 않느냐는 지적을 받았다.
나는 잘 해내고 싶었다. 나를 믿어준 감독님에게 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마 나에게 ‘와니와 준하’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 ‘후아유’와 ‘클래식’, ‘말아톤’이라는 작품까지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도 나의 예전 작품을 잘 보지 않는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와니와 준하’는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나의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가 지금 무대와 영화, 드라마를 오가면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작품으로 하나의 문턱을 넘은 덕분이라 생각한다.
데뷔한 지 20년이 지났다. 이제 배우로 산 세월이 내 삶의 절반을 채우고 있다. 한때는 ‘과연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로 혼란스러워했다. 나는 작품 안에서 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았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어떤 작품을 만나도 가슴이 뛰지 않고, 벅차지 않는 순간이 왔다.
그때 드라마 ‘비밀의 숲’을 만났다. ‘비밀의 숲’의 황시목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무감동 무감정으로 일하는 황시목이 오히려 내게 와 닿았다. 나는 작품을 고를 때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할 때는 내가 하는 연기가 좋은 영향을 주기를 바란다.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내가 ‘무대 배우’라는 생각도 변함이 없다. 서로 다른 매체의 경험이 나의 연기를 서로 보완해주는 건 틀림없다.
나는 여전히 무대에서 가장 자유롭다. 같은 작품을 하더라도 같은 관객을 만난 적 없고, 내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같은 배역을 맡아도 해석이 달라진다. 여전히 연기는 어렵고, 카메라는 두렵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내가 꿈을 따라가리라는 것이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가겠다”(‘이룰 수 없는 꿈’ 중에서)고 노래했던,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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