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7년 <햄릿>을 번안한 ‘하멸태자’에서 하멸태자 역을 맡아 열연하는 전무송 ⓒ전무송
지금도 미국 뉴욕 라마마 극장에 올랐던 ‘하멸태자’ 공연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햄릿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77년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았던 그 시절, 제3세계 예술가 초청으로 뉴욕 라마마 극장에서 연극을 할 기회를 얻었다. 극단 전체가 초청받은 것은 한국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시 ‘하멸태자’ 뉴욕 공연으로 굉장한 환호를 받았고 “뉴욕 밤하늘에 샛별이 떴다”는 기사까지 실릴 정도였다. 그때 처음으로 기립 박수와 커튼콜을 경험했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열연을 해도 관객들이 점잔을 떠느라고 조용히 박수치는 정도였는데, 미국에서는 발을 구르고 열렬한 환호까지 보내왔다. 무대 위에 서면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환청처럼 아득한 환호 속에서 ‘우리도 세계무대에서 통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멸태자’는 <햄릿>을 번안한 것으로 동양적인 장치와 의상, 음악 등으로 아름다운 동양미를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를 위해 색감이 화려한 한복부터 국악 연주를 위해 가야금과 대금 등을 챙겨 가기도 했다. 미국 공연인데도 한국어 대사를 그대로 진행했는데, 서양에서 <햄릿>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서 모두 아는 이야기라 장면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극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햄릿의 유명한 독백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래 우리 국악이 깔렸고, 칼싸움도 동양 검으로 이루어졌다. 연극을 보고 난 관객들은 한국의 동양미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공연이 끝났을 때 햄릿 역을 맡은 나에게 “검이 몇 단이냐?”, “태권도는 무슨 띠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미국에서는 서슬 퍼런 군사정권 아래서 연극 예술이 이 정도로 발달할 수 있느냐며 놀라워했다. 물론 예술계 종사자들에게 많은 규제와 환경적인 제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예술에 대한 감각과 열정은 군사정권 아래서도 변하지 않았다. 비록 손에 쥔 것은 없었지만, 세계무대를 정복할 수 있다는 꿈은 그때부터 가질 수 있었다. 지금 대단한 한류 열풍도 그때 이미 태동한 것인지 모른다.
‘하멸태자’의 뉴욕 공연 성공으로 프랑스 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8개 도시 순회공연도 이어졌다. 해외공연으로 우리의 가능성은 확인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한계도 느꼈던 시간이었다. 뉴욕 공연의 성과를 전해 들은 우리나라 방송국 문화부에서 취재를 나온다고 전해왔다. 그 소식에 단원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런데 카메라맨으로 일본 사람이 와서 의아했다. 알고 보니 해외에서 찍을 카메라가 없어서 일본 것을 빌린 것이었다. 그때 우리의 사정이 눈으로 확인되니 착잡한 기분이었다. 지금이야 수상 소식이나 해외 사정이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전해지지만 당시에는 사정이 열악해 소식도 늦고 전해지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어쨌거나 해외 관객들의 환호와 순회공연, 방송국 촬영으로 취해 있던 우리는 한국에 도착하는 즉시 김포공항에서부터 카퍼레이드를 하게 될 것이라며 들떠 있었다. 개선장군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 한껏 부풀었는데, 한국은 우리가 떠날 때의 현실 그대로였다. 해외순회 공연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지고 다시 춥고 배고픈 연극 인생으로 돌아왔다. 당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그랬다. 어쩌면 그런 시절이 있어서 ‘어디 두고 보자’는 오기도 생기고 미래에 대한 욕심도 부릴 수 있었으리라. 우리 민족 특유의 힘이 어려울 때 발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연극으로 ‘인생 공부’를 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꼈고, 오기와 치기를 부린 적도 있었다. 배우와 예술을 떠나 연극은 들여다보기만 해도 인생 공부를 할 수 있는 장르다. 연극 안에는 톨스토이도 있고 베토벤도 있다. 이보다 더 좋은 인생 공부는 없을 것이다. ‘깡통’이었던 내가 연기를 하면서 인생 공부, 철학 공부를 했다. 사람은 어느 직업을 가지든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연극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연극이 있어 그 과정마저 행복했다. 스승인 동랑 유치진 선생께서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 훌륭한 배우가 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열심히 해서 민들레 씨앗처럼 되라”고도 했다. 스승의 말이 내게는 평생 숙제로 남았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 떨어져도 꽃을 피우는 민들레 씨앗처럼 나도 그렇게 연극을 꽃피우는 풍토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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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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