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산리 노을 해안로에서 바라본 풍경│우희덕
슬며시 커튼을 젖히자 투명한 빛이 창 안으로 스며든다. 빛이 공간을 채우면 온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함이 깃든다. 마음이 열린다. 맑고 포근한 날의 제주와 비가 오고 흐린 날의 제주는 서로 다른 곳이다. 다른 장르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두말 할 것 없이 전자다. 그것은 컬러 사진과 흑백 사진, 푸른 바다와 검은 바다, 제주 해물라면과 그냥 라면 이상의 차이다. 제주에서 일주일 내내 흐리거나 비오는 날씨를 경험하면, 그런 환경에 혼자 있다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다만 삶을 노래하기보다 비관하기 쉽다. 줄곧 흐리다는 예보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맑은 날은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
그런 날은 특별하다. 실상 어제와 똑같은 하루일 뿐인데 특별한 하루가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집에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날.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일단 어디든 밖으로 나가야 하는 그런 날이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마주하는 곳이 제주라면, 내 앞에 펼쳐지는 곳이 모두 제주라면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계획 없이 나왔다고 해서 후회할 일은 없다. 조금 헤맬 뿐이다. 일단 떠나는 게 더 중요하다. 힘든 여행은 있어도 후회하는 여행은 없다. 미션을 수행하듯 많은 곳을 돌아다녀야 할 이유도 없다. 여행은 경쟁이 아니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천천히, 꾸준히 쌓아가는 여행의 마일리지는 소멸하지 않는다. 멀리 떠나거나 관광지를 고집할 필요도 없다. 관광지가 아니어도 여행할 곳은 많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마을을 둘러보는 것도 하나의 여행이 된다. 어느새 나는 한경면 고산리 마을을 걷는다. 단층 위주의 아기자기한 집들과 상점, 식당이 정겹다. 번잡하지 않고 평화롭다. 학교 앞 떡볶이를 재현했다는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고, 사인볼(회전간판)이 있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다. 볕 좋은 날 포구에 줄줄이 널어놓은 오징어도 몇 마리 산다.
그저 지나가는 길이라고 여기며 지나쳤을 때는 느끼지 못했다. 이곳이 이런 곳이었는지, 이런 풍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특히 자구내입구 사거리에서 자구내포구로 이어지는 노을해안로. 환상적인 꽃길을 자랑하는 녹산로나 중산간 지역을 시원하게 관통하는 산록남로보다 나은 건 그 이름뿐일지도 모른다. 수월봉 지질트레일이나 당산봉, 차귀도를 가기 위한 관문 정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을해안로 주변에 펼쳐지는 탁 트인 평야는 어디서도 보기 힘든 개방감을 선사한다. 끝없이 밭이 넓어 더없이 하늘이 높다. 맑은 날 빛을 발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질료들이 특별한 풍경을 만든다. 그 풍경이 아무것도 아닌 여행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 여행이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특별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에 어떤 하루를 건넨다.
우희덕 코미디 소설가_ 장편소설 <러블로그>로 제14회 세계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떠나 아무것도 없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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