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유산 눈꽃여행
나는 여행을 가기 전 A부터 Z까지 꼼꼼히 계획을 세우고 떠나는 유형이다. 반대로 여행 짝꿍인 남편은 일단 떠나고 보자는 즉흥적인 스타일이다. 처음에는 그런 무계획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난 몇 해간 마음대로 여행을 가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고 나니 시간이 될 때마다 떠나자고 했던 남편 말을 들을 걸 하고 후회가 됐다. 그러다 몇 해 전부터 가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가 결국 가지 못했던 장소가 떠올랐다. ‘내년 겨울에는 가야지’ 하면서 몇 년째 벼르고 있던 여행지였다. 겨우내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는 눈의 나라, 그림에서나 볼 듯한 아름다운 눈밭이 펼쳐진 겨울 대표 여행지 덕유산이 바로 그곳이다.
경남 거창군과 전북 무주군의 경계에 우뚝 서 있는 이 산은 덕이 많고 너그러운 모산이라 해 ‘덕유산’이라 불린다. 덕유산은 겨울에는 나무서리를 뜻하는 상고대의 환상적인 풍경과 아름다운 눈꽃을 보여주며, 봄에는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시원한 구천동 계곡이 유명하며, 가을에는 산등성이를 따라 붉은 비단처럼 펼쳐진 단풍을 볼 수 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주는 우리네 어머니처럼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해주는 여행지이다.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해발 1614m)은 등산을 즐기는 산악인에게도 좋지만 일반 여행자들도 쉽게 오를 수 있도록 관광 곤돌라가 설치돼 있어 정상인 향적봉에 가까운 설천봉까지 단 20분 만에 편하게 오를 수 있다.

눈의 요정을 다시 만나러 떠나다
덕유산에 오르기 위한 관광 곤돌라는 무주 덕유산 리조트 스키장 내에 있다. 무주 덕유산 리조트에서 설산에 오르기 전 필요한 준비물들을 구입하거나 아이젠도 빌릴 수 있다. 이 스키장을 둘러싸고 있는 덕유산을 바라보면 하얀 눈으로 뒤덮인 산줄기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어릴 적 사촌들과 함께 스키를 타러 무주 덕유산 리조트에 간 적이 있었다. 유난히도 운동신경이 없었던 나는 사촌들이 중급자 코스에서 멋지게 활강할 때 혼자 초보자 코스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내려왔다. 말이 초보자 코스이지 덕유산에 위치한 슬로프는 길고 가팔랐다. 이 까마득한 곳을 넘어지고 구르며 내려오다 보니 장갑도 잃어버리고 어디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패닉 상태가 됐다.
가족들이 찾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스키 폴대에 지탱한 채 겨우겨우 내려오고 있었다. ‘이렇게 힘든 것을 뭐가 재미있다고 타러 오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순간 눈앞에 은빛 눈보라가 고요하게 일어나 온몸을 감쌌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에서 반짝이며 내리는 눈송이들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어디를 봐도 깨끗한 순백의 세상이었고 눈의 요정이 뿌린 하얀 눈보라만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천천히 눈길을 즐기면서 내려오다 보니 그제서야 사람들이 왜 스키를 즐기는지 알게 됐다. 겨우 초보자 코스를 내려온 나는 전신 근육통과 몸살에 시달렸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본 것만으로도 행복한 여행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가끔 기억이 날 만큼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그 후로 25년이 훌쩍 지나 다시 이곳을 찾아왔다. 그때의 아름다운 풍경을 잊지 못하고 눈보라가 시작되는 향적봉에 오르기 위해 덕유산에 돌아온 것이다. 이번에는 사촌들이 아닌 든든한 남편을 데리고 왔다. 아름다운 풍경을 꼭 함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감정을 그도 느끼길 바라며 이번 겨울에는 덕유산 여행을 놓치지 않으려고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시간이 되는 날 무작정 출발했다. 새벽 일찍 출발하니 곤돌라가 시작하는 시간인 오전 9시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겨울 여행지로 유명한 만큼 이미 주차장에는 많은 관광객이 있었고 단체 관광객도 많아 리프트권을 구입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인터넷을 통해 미리 예약하면 할인도 되고 원하는 시간에 곤돌라를 탈 수 있다고 한다. 곤돌라를 타고 오르는 동안은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한 신비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창밖에 자욱한 구름이 걷히고 아름다운 설경이 시작됐다. 약 20분간 올라가니 드디어 설천봉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곤돌라에서 내리자마자 산 아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차가운 냉기가 밀려 들어왔다. 내복에 패딩, 장갑, 아이젠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 왔지만 밖으로 드러난 살들이 에일 듯 추웠다. 준비해온 핫팩을 비벼 서로 주머니에 넣어주며 우리는 최고봉인 향적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등산을 하며 최고의 경관을 뽑으라면 크리스마스 나무라고 불리는 구상나무 군락을 만났을 때일 것이다. 이곳을 오르다 보면 12월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도 크리스마스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비현실적인 풍경을 선물로 받았으니 크리스마스가 맞을 수도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또한 서리가 내린 상고대 모습은 아름답고도 기이했다. 생소한 아름다움에 눈길을 뺏긴 찰나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머리에도 새하얀 상고대가 맺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덕유산은 나무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머리카락까지도 상고대로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다.
천천히 설산을 음미하며 20분 정도 오르자 드디어 덕유산의 정상 향적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구상나무숲과 상고대 모습에 감탄하며 오르다 보니 힘든 줄도 몰랐다. 향적봉의 모습은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햇빛 속에서 흩날리는 눈보라가 반짝반짝 춤을 추고 있었다. 어릴 적 봤던 풍경이 변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이 밀려왔다. 미루고 미루던 여행지에 드디어 다다랐다는 기쁨에 마음이 벅찼다.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패딩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냉기로 춥고 힘들기도 했지만 오기 잘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눈길을 달리는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며 행복해 하는 남편 모습도 사진으로 남기고 얼음 나무 앞에서 함께 다정한 사진도 남겼다. 다시 곤돌라를 타러 내려온 설천봉에서 꽁꽁 언 손과 발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우동을 한 그릇씩 먹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끈한 국물은 몸도 마음도 한 번에 녹여줬다. 역시 등산 후에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꿀맛이다.

MZ세대도 겨울등반 대열에
등산은 나이 지긋하신 분들의 취미로만 여겨졌는데 요새는 젊은 친구들이 더 많이 한다고 한다. 개성이 표출되는 대표적 출구인 누리소통망(SNS)을 뒤덮은 겨울 등반 사진을 보면 이제는 시대를 불문하고 건강도 챙기고 감성까지 채우기 위해 등산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덕유산에 올라와 추위도 잊은 채 열심히 사진을 남기고 있는 커플부터 얇은 점퍼 하나 입고 사시나무 떨듯 겨우겨우 오르는 멋쟁이들, 아이젠도 차지 않고 꽝꽝 언 눈길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니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행은 즐겁고 행복해지기 위해 하는 것인데 준비가 미흡해 다치거나 건강을 해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계획을 꼼꼼히 세워 여행지 정보도 알아보고 때에 맞는 옷과 장비를 준비해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됐다.
남편은 이런 나에게 생각이 많다며 그렇게 일일이 계획을 세우면 어느 세월에 가겠냐며 “일단 떠나고 보자”고 핀잔을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준비를 해야만 떠나는 성격이다. 이런 강박적인 성격을 올해부터는 조금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획을 세운다는 핑계 아래 해야 할 일들을 미루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첫 번째로 계획 없이 무작정 떠난 이번 여행은 시행착오도 많이 했지만 즉흥적이었던 만큼 예측하지 못한 즐거움을 만나기도 해서 흥미로웠다. 미루던 일을 해냈다는 만족감도 컸다. ‘내일 하면 돼’ ‘다음번에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거야’ 하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미뤄왔다. 그래서 얻은 것은 후회뿐이었다. 해도 후회하고 하지 않아도 후회한다면 해보라는 말이 있다. 기회는 언제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기회란 다가올 때 꽉 잡아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생각이 너무 많은 것도, 계획만 세우다 그만두는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바뀔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바로 지금 하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루지 않을 것이다. 하고 싶었던 일도, 여행도. 누군가가 여행을 가기 가장 좋은 시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바로 지금!’이라고 말이다.
글·사진 조유리 작가
덕유산 곤돌라 정보
주소 전북 무주군 설천면 만선로 185
운영시간 월·화·수·목: 오전 10시~오후 4시
금: 오전 10시~오후 4시 30분
토·일: 오전 9시 30분~오후 4시 30분
동계: 오전 9시~오후 4시
연락처 063-322-9000
관광 곤돌라를 타고 해발 1520m 설천봉에 도착하면 덕유산 정상 향적봉을 20분 만에 쉽게 오를 수 있다. 산이 험하지 않아 오르기 좋으며 정상에 도달하면 적상산, 마이산, 가야산, 지리산, 계룡산, 무등산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파노라마 조망이 빼어난 곳이다.

덕유산 겨울 산행 TIP
사진의 아름다운 풍경과는 반대로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어 날씨가 매우 춥다. 바람이 거세기 때문에 몸 안으로 냉기가 스며들지 않도록 패딩을 입는 것을 추천한다. 모자와 장갑, 귀마개는 필수다, 길이 얼어 미끄럽기 때문에 아이젠을 착용해야 한다. 아이젠은 무주 리조트에서 5000원에 대여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있다면 설천봉에 완만한 경사가 있는 곳에서는 눈썰매도 탈 수 있으니 눈썰매용 포대 자루를 준비해 가는 것도 좋다.
덕유산 인생샷 장소
향적봉까지 오르는 등산로는 생각보다 좁기 때문에 사진을 찍기 적당한 곳이 많지 않다. 향적봉 정상비에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사진을 찍고 있는데 평일 기준 대기시간이 30분 이상 걸린다. 기다리기 힘든 이들을 위해 사람이 적고 예쁜 배경으로 인생샷을 남길 수 있는 포토 스폿을 소개한다.

설천봉에서 향적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로 향하기 전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왼쪽으로 무주 덕유산 리조트가 내려다보이는 길이 나타난다. 적당히 경사져 있어 썰매도 탈 수 있고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새하얀 눈밭을 볼 수 있다.

향적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헤매거나 위험하지 않게 안전선이 둘러져 있다. 이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곳곳에 포토 스폿이 준비돼 있다. 설산을 배경으로 고고하게 서있는 상고대 앞에서 멋진 사진을 남기는 것을 추천한다.
조유리
여행작가이자 인스타그램(@curryuri) 팔로워 19만 8000명을 보유한 인스타 셀럽. 남편인 코미디언 김재우와 함께 ‘카레부부’로 불린다. 저서로 <카레부부의 주말여행 버킷리스트> (2021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