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1,original,left[/SET_IMAGE]언젠가 아는 선배 작가분께서 내가 판단하기에 작은 일에 지나치게 반응한다 싶어 무례를 무릅쓰고 “선배님께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군요” 한마디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선배께서 “나는 소심한 게 아니라 세심한 거”라고 한다. 덧붙이기를 “대저 대인은 소인이며 소인은 대인”이라는, 소인인 것이 확실한 나 같은 사람이 듣기에는 다소 아리송한 말을 한다.
그 말인즉, 마음이 큰 사람은 작은 일에까지 마음을 쓰며 자신도 모르게 혹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나, 말하자면 남을 세심하게 배려하지만, 마음이 좁은 사람들은 그저 큰 것만 바라며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아무렇지 않아 하며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은 희생해도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기 십상이라는 것이었다.
선배의 말씀을 듣고 나서 현재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사람살이라는 게 어떤 방향으로 가야 옳은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풀과 꽃과 나비와 풀벌레와 도롱뇽처럼 그전에 그 누구에게도 상처 입힌 적 없이 살았을 법한, 선하디 선한, 작디 작은 몸피의 스님 한 분이 청와대 앞에서 무려 50여 일이 넘는 동안 곡기를 끊은 채 침묵의 고행을 했다. 누군가는 그랬다. 스님이 지키고자 하는 그 생명들을 위해 스님이 생명을 담보로 ‘극한 투쟁’을 벌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그러나 나는 혹자가 ‘단식투쟁’이라고도 하는 스님의 고행에 대해 차마 ‘투쟁’이라는 거친 용어를 붙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리고 묻고 싶다. 스님의 목숨을 내건 고행을 지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러면 당신은, 당신들은 언제 한 번이라도 당신의 목숨까지 내줄 마음을 먹을 만큼, 그 여린 목숨들, 그 죄없는 생명들을 사랑해 본 적이나 있더냐”고. 나 같은 범인으로서는 그리고 소인으로서는 감히 흉내도 못낼 초인적 고행을 수행한 지율스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언제 한번이라도 인간의 탐욕에 의해 무참하게 짓이겨지는 생명들이 내지르는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귀기울여본 적 있느냐고.
나는 우리 사회 사람들이 소위 ‘조국 근대화’ 과정을 지나오는 동안 모든 ‘작은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막아 왔고 이제 그것이 거의 만성화, 관성화된 것 아닌가 여겨진다. 고속철도 통과 구간인 천성산 환경영향평가 재실시를 주장하는 지율스님의 ‘침묵의 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와 같이 작은 것이라면 무조건 외면부터 하고 보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크고 많은 것 지상주의’의 영향 아니겠는가.
식당에 가도 크고 사람 많은 곳으로 몰리고, 조그만 구멍가게보다 대형 마트로 몰려가며, 농촌의 작은 학교들을 없애고, 대형 교회가 상징하듯 이제는 종교인들도 작고 소박한 것보다 크고 많은 것을 선호하며….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심지어 사람도 일단 키가 커야 대접받는 세상이 되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 된 지는 이제 새삼스레 말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시대도 지식정보화시대가 되었다는 마당에 우리 사회 사람들이 언제까지 산업화시대의 관성으로, ‘건설의 쇠망치 소리’에 고무되던 시기에 형성된 마인드로 작고 여린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를 막고만 있을 것인가.
귀를 막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귀를 막았던 우리 자신의 삶의 질이 나아지는 길은 그만큼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 되는가. 그리하여 나는 지율스님의 고행은, 이 시대 사람들 모두에게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았던 작고 여린 것들에게 이제 우리가 관심을 보일 때가 왔노라는 어떤 계시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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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