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이 세상에 인연은 있어도 악연은 없다. 소중하고도 소중한 인연마저 스스로 망쳐놓고 자기 합리화의 세 치 혀로 악연이었다고 우길 뿐이다. 혹여 첫 만남이 불쾌하거나 불행했다손 치더라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저 핑계에 불과하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은 인연입니다. 윤회나 환생을 믿지 않더라도 소중하지 않은 인연은 없지요. 처음엔 사소하여 잘 알아보지 못할 뿐, 이 사소함이야말로 존재의 자궁 같은 것. 블랙홀이나 미로일 수도 있지만 바로 이곳에서 꽃이 피고 새가 웁니다.
연기암의 물봉선 하나가 지는 데도 필연적인 이유가 있고, 그 꽃잎 위에 내린 이슬 하나에도 실로 머나먼 여정과 엄청난 비밀이 스며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65억 분의 1의 확률로 만난 그대와의 인연, 그 얼마나 섬뜩할 정도로 소중한지요. 극소와 극대, 순간과 영원은 다르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마치 전생의 악연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그동안 마주치지 않으려고 우리는 또 얼마나 오랫동안 몸부림을 쳤는지요. 악연은 잘못된 만남이 아니라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아예 만나지도 못하는 것.
결국 인연과 악연의 그 무서운 갈림길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아직은 가지 않은 길, 내내 가지 말아야 할 길- 악연의 길을 가기엔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렇다. 인연과 악연의 그 무서운 갈림길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다. 엄밀히 따져보면 인연은 평화의 개념이며, 악연은 전쟁의 개념이다. ‘좋은 전쟁’이 없듯이 ‘좋은 악연’도 없고, ‘나쁜 평화’가 없듯이 ‘나쁜 인연’도 없는 것이다.
도처에 대립과 불신과 증오가 팽배한 것도 사실이지만 ‘생명평화’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모두 악연을 넘어서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이 얼마나 눈물겹고 다행스러운 일인가. 사실 누군가와의 관계를 악연으로 규정하는 순간, 일종의 책임전가로 마음이 편할 듯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누군가로부터 꼭 그만한 책임전가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지난 1년 동안 ‘생명평화’의 이름으로 얻어 먹고, 얻어 자고, 마음까지 얻는 탁발순례의 먼 길 위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깨우쳤지만, 단 한마디로 얘기하라면 그것은 인연법이었다.
특히 먼 길을 함께 가는 순례단은 이러한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우선 순례단 자체만 놓고 보더라고 이 얼마나 질긴 인연인가. 영장을 받은 군인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같은 종교인도 아니요, 같은 직장인도 아니요, 또래도 아니요,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요,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하루 24시간을 동고동락하며 이 먼 길을 자발적으로 함께 가고 있으니 참으로 대단한 인연이 아닌가.
인연의 크고 넓고도 촘촘한 그물인 ‘인드라망’-. 우리는 모두 인연이라는 이 아름다운 그물에 걸린 ‘천상천하 유아독존’ 혹은 ‘독생자’이다. 관계의 총체성을 깨달은 독생자 혹은 유아독존, 이것이 ‘내가 바로 너이며 네가 바로 나’인 경지,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경지의 참 인연이 아니겠는가.
다시 반복하거니와 이 세상에 악연은 없다. 행여 악연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만 잘못 살았다는 것의 반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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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