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자락에 자리잡은 고장 거창. 잘생긴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이 있다. 황산마을이다. 이 마을은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조선 연산군 시절 신(愼)씨 일가가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만들어졌다. 마을에는 100~200년 전 지은 한옥 50여채가 지금도 운치 있게 늘어서 있다. 지금도 마을 주민 대부분은 신씨다. 마을을 거닐며 만난 대문에는 대부분 신씨 문패가 걸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 입구에 서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여행객을 반긴다. 수령600년을 훌쩍 넘긴 나무다. 마을이 형성될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앞으로는 맑은 시내가 흘러간다. 마을은 이 시내를 사이에 두고 두 지역으로 나뉜다. 시내 동쪽은 동녘이라고 부르고, 서쪽은 큰땀이라 부른다. 한옥이 모여 있는 마을은 큰땀이다.
큰땀마을 입구로 들어서자 양반마을임을 알게 해주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나타난다. 황산마을의 한옥은 대부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지은 것들이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지방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드러낸다.
한옥도 멋진 풍미를 자랑하지만 황산마을의 자랑은 오히려 흙담이다. 황산마을의 흙담은 아랫단에는 커다란 자연석을, 윗단에는 황토와 돌을 섞어 토석담을 쌓았다. 원활한 물 빠짐을 위해서다. 이 흙담은 2006년 등록문화재 259호로 지정됐다. 황산마을에는 1~2킬로미터 길이의 토담이 600여 년 전 양식 그대로 남아 있어 문화재로 높게 평가받는다.
기와집 사이로 흙담길이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모습이 호젓하다. 황산마을을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이 골목 저 골목 낮은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며 걷다 보면 발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담장 너머로는 기와지붕과 장독, 적막하게 서 있는 감나무가 보인다. 까치발을 하면 담장 너머로 집과 마당이 훤히 바라보인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고택이 궁금하면 들어가 구경하는 것도 가능하다. 야박한 도시와 달리 대부분의 집이 낮에도 대문을 잠그지 않는다.
문풍지를 바른 곁문과 툇마루, 햇볕이 잘 드는 마당, 항아리 등 우리네 전통가옥에서는 비움과 열림의 미학, 넉넉한 인심의 향기가 배어 나온다. 푸근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황산마을을 찾았다면 하룻밤쯤 묵기를 추천한다. 이 마을에서는 민박이 가능하다. 민박집이 10여 가구쯤 된다. 개중에는 아직도 장작불을 들이는 방을 가진 집도 있다. 밤이면 은은한 문살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든다. 소쩍새 우는 소리와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소리가 방을 가득 채운다. 대숲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마당을 천천히 거닐어 본다. 이내 가슴 속을 파고드는 평화로움은 도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일이다.
아침에는 되도록 일찍 일어나기를 권한다. 새벽안개가 마을을 자욱하게 감싸 안은 황홀경을 만날 수 있다. 밤새 눈이 내려앉은 한옥 기와의 선이 예쁘다. 자기도 모르게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뜨끈한 구들에 뉘었던 몸은 솜처럼 가볍다.
황산마을의 멋스런 담장길만큼이나 예쁜 벽화를 만날 기회도 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황산2구마을 담장에는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져 있다. 황산2구마을에 들어서자 거창의 특산물인 사과와 명승지인 수승대의 수려한 경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발길 가는 대로 벽화를 따라 이 골목 저 골목을 걷다 보면 벽에 그려진 나비와 잠자리, 주인 대신 집을 지키는 강아지, 담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온 황소, 고구려 고분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만날 수 있다. 담장 위에는 손짓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황산마을은 고즈넉한 시골의 정취를 만끽하며 여유로운 한때를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거창에서는 수승대를 빼놓을 수 없다. 이곳에서는 손꼽는 명소이자 덕유산이 간직한 절경 중의 절경이다. 수승대를 만나기 전 황산마을 앞에 자리잡은 구연서원의 관수루(觀水樓)가 눈에 들어온다. 관수루는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다. 영조 16년(1740) 건립했다.
‘관수’란 <맹자>에서 언급한 “물을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군자가 학문을 깨우치는 방법을 뜻한다. 관수루를 지나면 거북모양의 특이한 바위가 나타난다. 수승대다.
수승대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갈천이 위천으로 모여 구연(龜淵)을 만들면서 빚어놓은 거북모양의 커다란 천연바위 대(臺)다.
대의 높이는 약 10미터, 넓이는 50평방미터에 이르는데 생긴 모습이 꼭 거북을 닮았다. 수승대라는 이름에 얽힌 내력 또한 재미있다.
거창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였다. 국력이 쇠약해진 백제가 신라로 가던 사신을 전별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했다”고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칭했다.
조선 중종 때는 신권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신권은 바위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 하여 암구대(岩龜臺)라고 불렀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했다.
수승대라는 이름은 1543년 퇴계 이황이 유람차 마리면 영승리에 머무르면서 생겼다. 이름의 내력을 들은 이황은 아름다운 경치에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음이 비슷한 수승대(搜勝臺)로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냈다. 신권 선생이 이를 따르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수승대의 명물은 계곡 한가운데 자리한 거북바위다. 머리와 등짝이 꼭 거북을 닮았다. 바위에는 선현들이 새겨 넣은 시구가 즐비하다. 이황 선생이 남긴 옛 글 한편도 남아 있다.
“수송을 수승이라 새롭게 이름하노니 / 봄을 만난 경치 더욱 아름답구나 / 먼 산의 꽃들은 방긋거리고 / 응달진 골짜기에 잔설이 보이누나 / 나의 눈 수승대로 자꾸만 쏠려 / 수승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 언젠가 한 두루미 술을 가지고 / 수승의 절경을 만끽 하리라.”
구연교를 지나면 신권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친 정자 요수정(樂水停)이 등장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자연암반을 초석으로 이용했다. 우물마루에 사방으로 계자 난간을 둘렀다.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는 정연한 부챗살 형식의 서까래를 배치해 격조 높은 정자건물의 양식을 잘 반영했다. 수승대를 지나 계속 길을 따르다 보면 송계사가 나타난다. 덕유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고찰이다. 절로 드는 길이 운치 있어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금원산 자연휴양림도 찾을 만하다. 옛날 금원숭이가 하도 날뛰는 바람에 한 도승이 그를 바위 속에 가뒀다고 해서 금원산이라 불린다. 금원산에는 크게 이름난 골짜기가 두 곳 있다. 유안청계곡과 지재미골이다.
유안청계곡은 조선 중기 이 고장 선비들이 지방 향시를 목표로 공부하던 유안청이 자리한 골짜기다. 유안청폭포와 자운폭포, 소담이 주변 숲과 어우러져 뛰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유안청폭포는 소설가 이태가 쓴 책 <남부군>에 빨치산 남녀 500 여 명이 목욕하던 곳으로 기록돼 있다.
소나무·편백나무·은행나무로 가득한 겨울 숲은 청량감을 제공한다. 도시생활에 찌든 가슴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콘도식 산막과 통나무집, 야영장 등을 갖춰 하룻밤 묵기에도 좋다.
거창의 별미는 추어탕과 어탕국수다. 남원식 추어탕과 많이 다르다. 국물이 맑고 향이 세다. 어탕국수는 미꾸라지·피라미·붕어 등 잡어와 배추·부추를 넣고 푹 끓인 후 국수를 넣은 음식이다. 마늘과 다진 고추를 듬뿍 넣고 산초 가루를 뿌려 먹으면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겨울 햇살이 영롱하게 비추는 옛 담장길 산책, 한옥에서의 그윽한 하룻밤, 겨울 숲에서 보내는 청량한 시간, 몸을 데워주는 따뜻한 음식. 거창 황산마을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에 더 없이 좋은 여행지다.
글과 사진·최갑수(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