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너를 군에 보내고 돌아오던 날, 마음이 울컥했다.
‘눈에 밟힌다’는 옛말을 온몸으로 크게 실감하는 하루였다. 아빠의 머릿속은 온통 네 생각뿐이다. 지금 너는 무엇을 할까? 잠은 제대로 잘까? 음식은 입에 맞을까? 훈련은 잘 받고 있을까? 기상나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침구를 개고 있겠지?
너와 지난 삶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네가 아주 어렸을 때 출근하는 아빠에게 매달려 울던 일.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억지를 부리던 일, 네 종아리에 회초리를 댄 일, 네가 대학입시에 실패해 우리 가족이 패닉 상태에 빠졌던 일, 대학 합격통지서를 들고 온 가족이 환호성을 질렀던 일,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 중계를 관전하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던 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추억이 눈에 밟히더구나.
더불어 지난 날 나는 네게 훌륭한 아빠가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밀려온다. 너와 아주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마음과 달리 생활하는 몸으로 실천하기 어려웠던 것 같구나. 대화하자고 만든 자리에서 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훈계만 하지는 않았나 하는 때늦은 후회가 밀려와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는구나. 마음과 몸의 스킨십이 없는 대화는 서로에게 피로감만 가중시킨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너는 부디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고, 배추와 양념이 만나 김치가 되고, 게와 간장이 서로의 몸 속에 스미고 배어 게장이 된단다. 생면부지의 여자와 남자가 만나 연인이었다 운명처럼 한 가족을 이루듯, ‘인연이란 관계들의 숙성’임을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 생활감각을 통해 터득하는 군 생활이 되기 바란다.
나는 너를 아주 장하게 여긴다. 조금 늦되기는 해도 묵묵히 네 길을 걸어가는 너를 나는 자랑스럽게 여긴단다. 아빠가 워낙 성미가 급해 일만 생기면 닦달해댄 것이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늦게나마 그냥 지켜보기로 했단다. 당분간은 너와 축구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게 돼 무척 서운하고 답답하다.
너는 없지만 아빠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네 몫까지 열심히 관전한단다. 기성용의 실력은 절정을 맞은 듯하다. 한마디로 물이 올랐다. 구자철이 3호 골을 넣었다는 기쁜 소식도 전하마. 퀸즈 파크 레인저스는 안타깝게도 네가 염려한 것처럼 2부 리그로 강등되는 길로 들어선 것 같다.
늦은 밤 네가 없는 집에 들어서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힘들다. 하지만 너만 하겠느냐? 또 네 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음의 뜰에 수북하게 적막의 먼지가 내려앉는다. 군 생활이 예전에 비해 편해졌다고는 해도 아무려면 집만 하겠느냐? 마음도 몸도 춥고 고되다는 것 잘 안다.
하지만 젊은 날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으니 군 체험을 낭비로 여길 필요는 없다. 그곳 생활이 네 미래에 귀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몸도 마음도 더욱 단단해질뿐더러 타자와 관계에서도 배려와 이해와 관용의 미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또 기다리고 인내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이것들이 너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훈련 마치는 날 면회 가마. 잘 지내라. 사랑한다. 아빠가
글·이재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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