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의 한 단체가 주관한 영어 말하기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참가자 8명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자신이 가보고 싶은 곳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런데 미국의 도시들을 꼽은 참가자가 족히 절반은 됐다. 크게 실망했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내가 실망한 건 미국에 반감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도 미국을 좋아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엉클 샘’의 땅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듯하다. 미국을 사랑하는 한국인, 미국을 미워하는 한국인을 많이 봤다. 그러나 미국을 지구상의 한 나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못 보았다. 미국이 막강하지만 한국인에게는 수많은 다른 나라 중 하나일 뿐인데도 말이다.
정부와 업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나본 한국의 고위공무원이나 대기업 임원 중 적어도 절반은 미국유학파였다. 종종 그들은 ‘미국식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그 유명한 아이비리그 대학에서 석사나 박사를 땄다고 했다. 그들이 내게 소개한 동료들 역시 하버드나 MIT, 스탠퍼드를 나왔다. 미국 대학 학위가 그들의 자격증만이 아니라 정체성인 듯하다.
독도가 한국땅임을 알리려는 운동가나 비빔밥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려는 사람들은 툭하면 뉴욕타임스에 전면광고를 싣는다.
비빔밥의 경우 목표는 한국음식의 ‘세계화’다. 그러면서도 미국이라는 한 나라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 게 과연 ‘세계화’일까? 한국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와 ‘글로벌 표준’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런 기준은 미국식 기준이거나 관습에 불과하다. 나머지 세계가 미국식 기준이나 관습을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비근한 예가 ‘우측보행’ 시책이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우측보행 안내 표지를 본다. 우측보행이 그런 중요한 글로벌 스탠더드 중 하나인 듯하다. 이 또한 미국이 하므로 그렇다는 식이다. 몇몇 미국인 친구에게 우측보행을 물었다. 그들은 자신이 좌측보행을 하는지 우측보행을 하는지조차 몰랐다. 한 명은 “내가 우측보행을 할지 모르지만 한번도 의식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우측보행은 ‘표준’이 아닌 관습일 뿐이다. 내 나라 영국에서는 사람들이 주로 좌측보행을 한다. 그렇다고 한국인이 영국인의 관습을 ‘표준’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스탠더드가 진짜 필요하다면 한국의 스탠더드를 찾으라고.
한국 밖에는 넓은 세계가 놓여 있다. 그곳은 토머스 프리드먼이 말한 것처럼 미국적으로 획일화한 ‘평평한’ 세계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믿도록 강요받는다. 더구나 미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들이 한국에서 배울 점도 수없이 많다.
글·대니얼 튜더
대니얼 튜더(Daniel Tudor)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철학·경제학을 전공한 후 맨체스터대에서 MBA를 땄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처음 방한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는 영국의 경제주간지 서울특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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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