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층에서 ‘빼때기’를 아는 이들이 몇이나 될까. 빼때기를 모르는데 빼때기죽을 알 리 없다. 지금은 종적을 찾아보기 힘든 빼때기는 날고구마를 얇게 썰어 볕에 말린 것으로 경상도와 제주도 일대에서 흔히 먹던 군것질거리였다. 빼때기라는 이름은 건조과정에서 수분이 증발하면 얇게 썬 고구마가 비틀어지는 모습을 빗대서 붙여진 이름이다. 절간(切干) 고구마라고도 하는데 식량이 부족할 때에는 이것으로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빼때기죽인데, 농사를 짓기 힘들었던 통영 인근의 섬 지역에서는 겨울철에 대용식 역할을 하기도 했다.
빼때기의 사촌쯤 되는 ‘쫄때기’도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쫀득이’라고도 부르는 쫄때기는 고구마를 살짝 삶아서 뭉텅뭉텅 썰어 말린 것이다. 빼때기는 주로 팥, 강낭콩, 좁쌀 등과 함께 죽을 쑤어 주식 대신 먹었고, 쫄때기는 간식으로 흔히 먹었다. ‘생절간’이라고도 하는 빼때기는 대개 타박고구마로 만들었고 ‘진절간’이라 부르는 쫄때기는 주로 물고구마로 만들었다.
고구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조엄(趙?)이 1763년 통신정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대마도에서 가져온 것이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사행기록인 <해사일기(海?日記)>는 “이 섬에 먹을 수 있는 풀뿌리가 있는데 감저(甘藷) 또는 효자마(孝子麻)라 부른다. 왜음으로 고귀이마(古貴爲麻)라 하는 이것은 생김새가 산약과 같고 무와도 같으며 오이나 토란과도 같아 그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고 했다. 또 “그것은 생으로 먹을 수도 있고 구워서도 먹으며 삶아서 먹을 수도 있다. 곡식과 섞어 죽을 쑤어도 되고 썰어서 정과(正果)로 써도 된다. 떡을 만들거나 밥에 섞거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흉년을 지낼 밑천으로 좋을 듯하였다”며 용도까지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고구마는 고귀이마, 즉 대마도 사람들이 부르던 ‘고코이모(孝行芋)’라는 일본명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고구마를 조저(趙藷)라고도 하는데 이는 조엄이 들여왔다 해서 붙은 명칭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설도 있다. 식량문제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던 실학자 서경창이 1813년에 저술한 <종저방(種藷方)>에는 고구마가 처음으로 도입된 시기를 만력연간(1573∼1619)이라 했고, 1633년에 비변사에서 고구마 보급에 노력하였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구마의 도입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또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온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독려하고, 도입 후 각고의 노력으로 재배법을 터득하여 전국에 보급한 공은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광려는 1762년에 〈서군방보후(書群芳譜後)>를 저술해 고구마의 재배와 보급을 주장했으며, 조엄에게 부탁하여 가져온 고구마를 재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그는 동래부사 강필리를 설득하여 고구마에 관심을 갖게 했다.
강필리는 동래에서 시험 재배에 성공하고 1766년에 <강씨감저보(姜氏甘藷譜)>라는 책을 펴낸다. 따뜻한 남부 해안지방에서 시작된 고구마 배양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데 기여한 것은 김장순과 선종한 두 사람이다. 이들은 서울에서 고구마를 키웠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1813년에 <감저신보(甘藷新譜)>를 발간하였다.
그 외에도 서호수와 그의 아들 서유구, 유중림, 박제가 등도 이 땅에 고구마가 뿌리내리는 데 이바지한 이들이다. 이렇게 많은 선구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고구마는 지금 우리 곁에 있는 것이다. 통영의 ‘할매우짜’와 ‘꿀단지’에 가면 배고픈 시절에 먹던 빼때기죽을 맛볼 수 있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201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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