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정조 시대(1776~1800)를 정치와 문화중흥의 흐름이 전개된 조선의 르네상스라 부른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하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규장각은 바로 이러한 정조 개혁정책의 산실이었다.
규장각은 세조 때에 이미 양성지에 의해 그 설치가 제창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친필 현판을 걸었다. 그리고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나 어필(御筆) 등 일부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후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던 규장각은 정조가 ‘계지술사(繼志述事 :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정사를 편다)’의 명분 아래 그의 정치세력 내지 문화정책의 추진기관으로 힘을 실어 주면서, 역대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의 중심 기관이자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되었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의 언덕을 골라 2층의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1층을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여 역대 선왕이 남긴 어제, 어필 등을 보관하게 하고 ‘규장각’이라 이름하였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참신하고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규장각에 모았다. 정약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대표적인데 특히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는 서얼 출신이었으나 정조는 이들의 능력을 적극 활용하였다.
규장각의 중요한 업무는 역대 왕들의 글이나 책 등을 정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개혁정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법고창신(法古創新 : 옛 법을 본받아 새것을 창출한다)’은 규장각 설립에 가장 부합되는 정신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하여 아무리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하여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였다. ‘객래불기(客來不起 : 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아라)’와 같은 현판을 직접 내리기도 했다.
정조는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의 전당과 유교정치 이념을 전파하는 중심 기관으로 만든 것처럼 규장각을 통하여 학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개혁정책들을 수립하였다.
정조는 젊은 관리들이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는 제도인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이미 과거를 거친 사람 가운데 37세 이하의 젊은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시키는 제도로서, 이들은 매월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치르는 등 강도 높은 교육을 받으며 개혁정책의 방향을 학습했다. 초계문신 제도는 1781년 시작돼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총 138명이 뽑혔는데, 이 제도는 정조의 정책을 추진하는 세력을 양성하는 정치적 장치이기도 하였다. 대표적 인물이 정약용으로, 정약용은 탁월한 재능으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개혁정책의 중심이 되었다.
1798년 정조는 스스로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 온 냇가에 비추는 밝은 달과 같은 존재)’으로 정하는데, 이러한 자부심의 바탕에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수행한 정치·문화운동의 성과를 확인하고 스스로 성인 군주가 되겠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었다. 정조개혁정책의 산실인 규장각은 현재 창덕궁 후원에서도 가장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올 가을 규장각을 찾아 정조와 정조의 개혁정책의 든든한 원군이 된 정약용, 이덕무 등의 자취를 찾아보면 좋을 것이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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