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봄·가을이 참으로 짧기만 하다. 봄이 오나 싶으면 어느 새 더운 여름이고, 더위가 수그러들고 고운 단풍의 계절이 오나 싶으면 순식간에 찬바람이 돈다. 전 지구적인 기후 변화 탓일까.
가장 좋은 계절인 가을을 조금은 더 만끽하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 곱게 물들었던 단풍이 가을 비바람 맞으며 이리저리 떨어질 때 우리는 잠시 넋을 놓는다. 또 한 해가 저무는구나, 하염없이 그런 생각에 젖어든다. 여름날 그리도 무성한 잎사귀들로 흥성하던 나무들이, 가을날 고운 단풍으로 한껏 치장하던 나무들이 그 마지막 잎새를 떨굴 때, 우리는 안타까운 조바심에 떨지 않을 도리가 없다. 잎을 떨군 나목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목(裸木). 화가 박수근(1914∼1965)의 그림과 작가 박완서(1931∼2011)의 소설도 나목의 순리를 성찰한 결과의 일환이다. 엄혹했던 6·25전쟁의 한복판 미8군 매점에서 둘은 만난 적이 있다. 그 당시 박수근은 미군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며 애면글면 생계를 이어가던 고단한 ‘환쟁이’였고, 대학을 중퇴한 박완서는 미군들에게 그림을 사달라고 권유하던 처녀였다. 신산한 시절이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 때문에 모친이 가계를 책임져야 했고 그 때문에 일찌감치 생활의 무게를 느껴야 했던 박수근이었다. 게다가 전쟁 상황이었다. 그의 <나무와 두여인>은 그런 상황에 대한 화가의 인식을 담고 있다.
거친 마티에르 위에 고목 같은 나목이 그려져 있다. 한 여인은 머리에 짐을 이고 어디론가 잰걸음을 하고 있고, 다른 여인은 아이를 업고 있다. 잎사귀 하나 없이 고목처럼 서 있는 나무나 두 여인은 처지가 비슷하다. 도대체 곧 다가올 세한(歲寒)을 어찌 견디어 봄을 맞을 것인가.
박수근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박완서가 지은 장편이 <나목>이다. 전쟁 중 미군부대 매점 초상화 가게에서 일하는 여주인공 이경이 불우한 화가 옥희도를 만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전쟁과 분단, 가족 상황 등과 함께 복합적으로 다룬 소설이다. 여성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두 오빠의 죽음이 마치 자기 잘못인 것 같은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이경은 불우한 화가 옥희도의 내면에서 자기와 비슷한 황량함을 느끼게 되면서 이끌리는 경험을 한다. 어느날 옥희도가 초상화 가게에 나타나지 않자 이경은 그의 집을 찾아간다. 거기서 그의 캔버스 위에 그려진 ‘고목(枯木 : 가뭄 속의 고목)’ 그림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연이 엇갈리고 세월이 흐른 뒤에 그의 유작전에 가서야 그 그림이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슬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근심스러운 마음에는 봄에의 향기가 애달프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에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게는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무를 저리도 꿋꿋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나목>).
김장철 낙엽을 끝낸 나목을 ‘저리도 꿋꿋하게’ 하고, 그 옆의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을 버티게 하는 힘은 다른 것이 아니라 ‘봄에의 믿음’ 혹은 ‘그리움’임을 지목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고목’과 ‘나목’의 거리는 분명하다. 그리움마저 말라버리고 고갈된 것 같은 가뭄 속의 고목과는 달리 김장철 나목은 한없는 그리움으로 소진된 듯 넘치는 생명력을 보인다는 것이다. 나목의 계절이다. 나목이 찬바람에 애처롭게 흔들릴수록 우리네 그리움도 사무치게 마련이다. 그리움을 그리워하게 된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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