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은도 ‘해넘이길’을 가려면 신안군청이 있는 압해도에서 배를 타고 암태도로 간 뒤 다시 연도교를 건너야 한다. 가는 길은 좀 복잡하다. 목포에서 차를 타고 압해도 서쪽 끝 송공선착장으로 간 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암태도로 건너가 다시 차를 타고 암태도와 자은도를 잇는 은암대교를 건너 섬 북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걷기 여행자를 자처하며 험한 길을 택했다. 압해도 송공선착장에서 바라보면 암태도는 손에 잡힐 듯 코앞에 있다.
섬과 섬 잇는 다리를 건너 자은도 도착
풍랑주의보가 막 해제된 지난해 12월 21일 철부선을 탔다. 185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 온돌 객실엔 주민으로 보이는 십여 명뿐 여행객은 거의 없었다. 그 중 바이올린과 기타 등 각각 악기를 짊어진 여중생 일행이 눈에 띄었다. 오전에 배를 타고 나가 학원 수업을 마친 후 점심때가 되어 들어오는 참이란다. 암태도는 더 이상 단절된 섬이 아니다.
신안 해넘이길은 약 12킬로미터, 빠른 걸음으로 걷게 되면 3시간이면 마칠 수 있다. 이정표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오후 12시 배로 들어왔으니 충분히 당일 여행이 가능한 셈이다.
선착장에서부터 걷기 시작했다. 물론 택시를 잡거나 히치하이킹을 할 수 있는 데까지다. 선착장에서 해넘이길이 시작되는 자은도 송산리 정류장까지는 약 20킬로미터가 넘는다. 여기까지 걸어가면 해가 지고 말 것이다.
야트막한 오르막을 오르니, 왼편으로 사리(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때) 물때에 맞춰 드러난 개펄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개펄은 참기름을 칠한 듯 뺀질뺀질하게 빛이 났다.
암태도는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창작과비평사, 1981)로 이름을 알렸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 실제로 암태도에서 일어난 소작인들의 투쟁을 다룬 소설이다. 당시 암태도 사람들은 지주와의 투쟁을 통해 7할이던 소작료를 4할로 낮췄다. 이후 소작료 투쟁을 넘어 일제 치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성공한 봉기로 발전시켰다.
15분쯤 걸어가니 삼거리에 ‘암태도농민항쟁사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묘소 앞에 세워진 비는 아마도 당시 항쟁에 나선 후손이 세웠을 성싶다. 섬 안 곳곳에는 암태도에서 시작된 농민항쟁을 기념하는 비와 탑이 있었는데, 면사무소 앞에는 기념탑이 있다.
약 7킬로미터를 걸으니 기동리 삼거리에 닿았다. 암태도 북쪽으로는 자은도가 있고, 남쪽으로는 안좌·팔금도가 연도교로 이어져 있다. 기동리는 남쪽 안좌·팔금에서 올라오는 길과 동쪽 오도선착장에서 오는 길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버스 정류장 옆 경로당 앞에서 나이 지긋한 주민 몇 명이 볕을 쬐고 있었다.
“기동리는 예전 이름으로 텃골인데, 가히 사람이 터를 잡을 만한 마을이란 뜻이지. 이 마을도 소작료 투쟁할 때 많이 나섰어. 그래서 신안에서 똑똑한 사람은 모두 암태도에 있다는 말이 있었어.”
한 노인이 마을에서 300만원을 추렴해 세웠다는 기념탑을 가리키며 말했다. 경로당 앞으로 승봉산(355미터)의 둥그런 능선이 올려다보였다. 마을은 산을 등지고 들판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들판엔 푸른 대파와 양파, 마늘밭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 버스를 탔다. 팔금에서 올라온 버스는 은암대교를 건너 자은면사무소가 있는 구영리까지 갔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오후 3시가 다 돼서야 송산리 정류장, 둔장해수욕장 앞에 당도했다.
비로소 해넘이길 이정표가 보였다. 정말로 머나먼 길이다. 서울에서 길을 나선다면, 신안 해넘이길 초입까지 가기 위해 꼬박 10시간 이상을 이동해야 한다.
쌀쌀한 바람이 두 뺨을 핥는 차가운 날씨에 혼자서 길을 나서려니 외롭기도 했지만, 미지의 길에 대한 기대감이 앞섰다.
한운리는 깃봉산(150미터) 아래 자리 잡은 소담한 마을이다.
마을 입구 아담한 돌담길 옆으로 시금치 밭이 성했다. 해풍을 맞은 바닷가 시금치가 단단해 보였다. 마을 북쪽으로 소나무 방풍림 너머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해넘이길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서울에서 해넘이길 초입까지 꼬박 10시간
신안 해넘이길은 여름에는 행락객으로 붐비고 봄·가을에는 도보 여행으로 적지 않은 사람이 찾고 있지만 겨울에는 거의 찾지 않는다고 한다. 덕분에 12킬로미터의 길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겨울 도보 여행의 매력이다.
해넘이길 이정표는 딱 11개 있다. 어림잡아 1킬로미터 걸어가면 하나씩 나오는 셈이니 거리 측정이 따로 필요 없다. 한운리 마을 북쪽은 바닷가를 끼고 도는 길로 거센 북풍이 불어닥쳤다.
해넘이길은 산불 확산 방지와 벌목을 위해 만든 임도(林道)에 자갈모래를 깔아 걷기 좋게 만들었다. 애초 차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길이라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편이다.
하지만 해안 절벽 위로 난 길은 파도소리와 바람소리에 귀가 앵앵거릴 정도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는 있지만 대화하긴 힘들다. 반면 해안 절벽에서 살짝 벗어나면 바람소리가 금방 잦아들었다.
한운리에서 한 시간 남짓 가면 쉼터가 있다. 송산리 정류장에서 여기까지 약 5.2킬로미터. 섬의 북쪽으로 바람이 가장 거세게 불어닥치는 곳이다. 서쪽으로 오후의 태양이 벌써 산마루까지 내려앉았다. 오후 4시, 해넘이가 시작됐다.
북쪽 전망대에서 다시 한 시간 정도 가면 둔장해수욕장이다.
해안 백사장의 길이가 2킬로미터를 넘는 곳으로 거센 파도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은빛을 발하는 파도는 거대한 물고기의 비늘처럼 빛났다.
둔장해수욕장에서 약 4킬로미터 구간은 백사장 옆 소나무숲을 따라 조성돼 있다.
입구에 서 있는 ‘동양 최대의 송림’이라는 입간판 아래로 들어서면 백사장길로 진입한다. 가는 모래를 밟는 기분이 제법 좋다.
오후 5시 30분, 붉은 해는 이제 기운을 다하고 해수면 위 구름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백사장이 끝나는 사월포 입구가 신안 해넘이길의 끝이다. 여기에서 아스팔트길을 따라 나오면 두모리 정류장이다. 택시를 타고 오도선착장으로 나와 오후 7시 배에 올랐다. 이 배는 신안 압해도가 아닌 목포 북항으로 바로 들어간다. 북항은 목포역에서 가깝고 버스터미널로 이동하기도 편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도보 여행자라면 이편이 좋다.
글과 사진·김영주(여행 칼럼니스트)
가는 길
신안 송공항까지 가기
● 신안 자은도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를 타야 한다. 차를 이용하면 서해안고속도로 끝까지 간 후 신안으로 가는 압해대교를 건넌다. 압해대교를 건너 15분 더 직진하면 송공항이다. 서울에서 차로 4시간 정도 걸린다.
● 기차를 이용하면 서울 용산에서 KTX 등을 통해 목포역으로 간 뒤 근처 항동시장에서 130번 시내버스를 타면 송공항까지 갈 수 있다. 130번 버스는 1시간에 1대 꼴로 운행되며, 정확한 시간은 신안군청 홈페이지(www.shian.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공항에서 암태도 오도선착장 가기
● 신안농협에서 운행하는 철부선이 동절기(4월까지)에 매일 13회(오전 7·8·9·10·11시, 낮 12시, 오후 1시 10분, 2·3·4·5시, 6시 20분, 7시 50분) 운행된다. 요금은 7,700원이다. 암태도로 가는 배편은 매일 10회 운행된다.
암태도 오도선착장에서 자은도 송산리 가기
● 섬 내 마을버스는 오전 8시 30분·11시 30분, 오후 2시 30분·4시30분에 있다. 육지에서 배가 들어오는 시간에 맞춰 운행하기 때문에 오전 8·11시, 오후 2·4시 배를 타면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 송산리 정류장까지 갈 수 있다.
● 여러모로 불편함이 있기 때문에 차를 갖고 들어가는 게 좋다. 길 시작점인 송산리와 종착점인 두모리는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으므로 차를 회수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차가 없다면 섬 내 이동은 택시를 타는 수밖에 없다. 자은면사무소가 있는 구영리에 개인택시가 서너 대 있다. 자은도 두모리에서 압해도 오도선착장까지 오는 택시비는 약 2만원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