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라도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있게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도 늘 가슴속에 깊이 모시며 삶의 굽이굽이마다 떠올릴 수 있는 만남이라면 정말 귀중하다. 인생을 마치기 전에 이러한 만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내게는 돌아가신 공병우 박사님과의 만남이 그러한 행운이었다.
공병우 박사님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안과 명의로 이름을 날리셨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당신께서는 한글의 중요성을 깨닫고 겨레의 눈을 뜨게 하는 큰 의사로서 한글 기계화와 한글 과학화에 늘 앞장서셨다.
1990년이었다. 만 서른이 안 된 젊은 교사는 학교도서관을 만드느라 정신없이 몰두하고 있었다. 책을 모으고 도서반과 함께 서가를 손질했다. 다행스럽게도 도서관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당시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컴퓨터가 안성맞춤이었다.
컴퓨터 통신은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도구였다. 실제로 컴퓨터통신은 도서관의 정신과 효용성을 그대로 구현하는 마법사였다. 즉 가치있는 것들을 창조하고 저장하며 이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컴퓨터 통신은 도서관의 운영과 방향을 암시하는, 도서관 그 자체였다. 지금 인터넷과 모바일이 보여주는 세상을 충분히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었다.
마땅하게 물어볼 곳도 없던 때였다. 컴퓨터 통신은 모르는 곳과 무한히 연결되며 그 끝에 마주 앉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전문프로그래머는 물론 소방수, 형사, 자영업자, 교사 등등 그야말로 이 세상 모든 이들과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고, 그렇게 또 다른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공병우 박사님을 만나 뵌 것도 그 덕분이었다.
당시 박사님께서는 한글문화원을 운영하고 계셨다. 토종 워드프로세서를 만든 한글 개발자들은 물론 젊은 인재들에게 공간을 무료로 쓰게 해 주시고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유능하나 가난한 청춘들에게 공 박사님은 거인이셨다. 특히 한글을 컴퓨터에서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문제인 한글 코드 문제가 필연적으로 불거졌을 때 한글 과학화를 위한 방향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제시하고 가장 열정적으로 추진하셨다.
숭문고 도서반 학생들을 데리고 공병우 박사님을 인터뷰하러 갔을 때, 당시에 이미 팔순이 넘으신 당신께서 일일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고 짜장면과 돈까스를 사 주셨던 일은 도서반의 전설이다. 그뿐인가.
당신께서 만드신 새 타자기도 직접 창고에서 꺼내 주셨다. 언제나 사무실 한 편에 간이침대를 하나 놓고 열심히 일하시던 모습, 소박한 자세와 열정적인 태도는 비단 나만의 마음 속 은사는 아니었다. 당시에 선생님께 영향을 받았던 영혼들은 한글의 기계화, 과학화는 물론 한글의 미학성과 철학성 등 다양한 흐름들을 낳으며 지금까지 다양하게 확대되고 무한하게 심화되어 왔다.
최근 서울여대 시각디자인학과 한재준 교수를 만나서 한글 정신을 구현하는 한글 인테리어를 함께 고민하게 된 것도 이러한 흐름의 하나이리라. 한재준 교수 또한 공병우 박사님을 마음 깊이 모시고 한글의 미학성과 과학화에 전력투구해 온 한글 타이포그라피 전문가다.
책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는 우리 아이들을 책을 쓸 수 있는 인재로 키우고 자신의 저작물 가운데 하나 이상을 인터넷에서 누구나 무료로 읽을 수 있게 하자며 온 힘을 다하고 있다. 이는 모두 세종대왕께서 이미 밝히고 공병우 박사님이 보여주었듯 애민과 자주, 실용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글·허병두(서울 숭문고 교사·‘책따세’ 대표) 2013.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