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장의 역사는 술의 역사와 함께할 것이다. 술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애주가들에게 애초부터 해장은 아침을 여는 의식이었다. 어제의 술로 지친 속을 달래주어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장이라는 단어는 숙취를 푼다는 의미의 해정(解)에서 비롯되었지만 속을 푼다는 뜻의 해장(解腸)으로 자리 잡았다.
해장의 방법은 나라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며, 술꾼마다 다르다.
서양 사람들은 토마토주스에 보드카를 섞은 칵테일을 마시기도 하고 소금과 식초에 절인 청어를 먹기도 하며, 심지어 식은 피자나 햄버거로 해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해장은 역시 뜨겁고 얼큰한 국물을 들이켜며 “시원하다”를 읊조려야 제격이다. 조선시대의 여러 요리책에서 해장국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주막에서 먹던 서민의 음식이라 그런지, 그 시절 흔히 먹던 탕반의 범주에 포함시켜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굳이 그 흔적을 찾자면 고려 말의 중국어학습서 <노걸대(老乞大)>에 “육즙에 정육을 잘게 썰어 국수와 함께 넣고 천초(川椒)가루와 파를 넣는다”고 기록되어 있는 성주탕(醒酒湯)을 들 수 있다.
20세기 초에 출간된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효종갱(曉鍾羹)도 나온다. “배추속대, 콩나물, 송이, 표고, 쇠갈비, 해삼, 전복을 토장에 섞어 종일토록 푹 곤다”는 효종갱은 세도가들이 새벽에 남한산성에서 배달시켜 먹던 양반 해장국이다. 해장국을 옛날에는 술국이라고 했다. 술집에서 안주로도 팔고 술 마신 다음날 해장하느라고 먹는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좀 유식한 축들은 주탕(酒湯)이라 불렀고, 밥을 말면 주가탕반(酒家湯飯)이라고 했다.
소설가 박종화(朴鍾和·1901~1981)는 한 세기 전의 주당이 술국으로 해장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묘사한 바 있다. “동지섣달 길고 긴 추운 밤을 지내다가 새벽이 찾아와서 일을 하러 직장으로 나갈 때, 찬밥 한 덩어리를 들고 양골 끓이는 술집으로 찾아가서 약주술 두서너 잔에 양골로 안주를 하고 밤 지낸 빈창자에 술국밥을 먹는 맛이란, 그 시점만은 천하의 행복을 독차지한 성싶다.”
양골국은 살코기를 발라낸 뼈다귀를 토막 쳐서 밤새 곤 국물에 된장을 풀고 우거지를 듬뿍 넣어 흐무러지도록 푹 끓인 일종의 토장국이다.
그 시절의 술꾼들은 아예 술국집에 자신의 전용 뚝배기를 맡겨놓고 밥은 베보에 싸갖고 가서 뜨거운 국물로 토렴한 뒤 다시 국을 부어 말아 먹었다는데, 유명한 집일수록 맡아놓은 뚝배기의 수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해장국은 지역별로 다양하다. 전주의 콩나물국밥, 부산의 재첩국과 복국, 대구의 따로국밥, 충청도의 올갱이국, 강원도의 곰치국 등이 유명하지만 서울을 대표하는 해장국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선짓국이다. 그러나 예전의 술국에는 선지가 들어가지 않았다.
선지를 술국에 넣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무렵부터라는 것이 풍속에 밝았던 언론인 조풍연(趙豊衍)의 설명이다. 그는 또 선지를 넣은 연유가 손님들이 원하는 건더기를 늘리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당시의 유명한 해장국집이었던 돈암동의 ‘곽서방네집’에서 확인했노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즈음부터 술국이라는 이름도 해장국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음식도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선지해장국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대한민국 주당들의 속을 달래주고 있다. 서울 종로구 청진동의 ‘청진옥’과 동대문구 용두동의 ‘어머니 대성집’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선지해장국의 명가들이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 2013.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