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슬로길은 총 11코스, 약 42킬로미터에 달한다. 하루에 걷기는 불가능하며, 이틀을 머물러도 벅찬 길이다. 점심께 들어가면 1~4코스까지는 갈 수 있다.
청산도 도청항에 내려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가면, 바다를 끼고 돌다가 내륙으로 들어와 고샅길과 돌담길을 걷고 다시 바닷가를 끼고 도는 길이 나타난다. 길 한쪽은 푸른 바다, 그리고 다른 한편은 섬 안쪽에 자리잡은 야트막한 야산을 끼고 돈다. 완주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어느 길을 걸어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길이다. 영화 <서편제>의 배경으로 등장한 아름다운 돌담길로 이미 유명하다.
아름다운 섬 마을 풍경은 단지 영화 속에서만 감상할 수 있다.
이제 청산도는 사철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겨울철에도 섬에 닿는 배가 하루 여섯 차례 운항된다.
영화 <서편제>·드라마 <봄의 왈츠>로 유명세
찬바람이 탱탱 부는 날, 섬 포구를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은 저마다 분주했다. 한겨울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포구, ‘외로운 길을 걷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순간 도청항 바로 앞 방문자센터를 발견했다. 다행히 안내원이 맞아줬다.
“슬로길 오셨네. 한겨울에는 많이 없는데….”
안내원 김정숙 씨는 아르바이트 삼아 일주일에 이틀 정도 방문자센터를 지키고 있다고 했다.
“어디서 슬로길을 시작해야 하죠?”
“나가서 바로 오른쪽 길로 들어가면 거기 슬로길 푯말이 있어요. 오늘은 4코스까지 걷는 게 좋아요. 거기 민박집이 있으니까 자고, 내일 일찍 서두르면 일주할 수 있을 겁니다.”
도청항에서 한눈에 보이는 도락리까지 ‘미항길’과 ‘동구정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미항길은 아름다운 도청항을 끼고 도는 길이고, 동구정길은 섬 동쪽 마을을 이르는 이름이다.
봄이면 은빛 물비늘과 유채꽃·푸른 보리 초원 펼쳐져
도락리에 이르니 비로소 ‘슬로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였다. 물고기모양이 새겨진 나무 푯말, 아가미 부위가 진행 방향이다. 마을 안으로 이어진 길은 돌담과 시멘트 블록이 뒤섞인 고샅길이었다.
옛 모습을 최대한 남겨두고 새로 보수를 한 것이다.
밭 사이로 난 시멘트 길을 오르면 언덕이다. 여기가 <서편제> 영화촬영지에 나오는 돌담길이 있는 곳이다. 청산도를 방문했다면 안 가볼 수 없는 필수 코스.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넘은 <서편제>에서 주인공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돌담길을 걷는 장면은 한국영화사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지에 올라서면 남쪽으로 청산도 도락리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드문드문 떠 있는 양식장 칸막이가 팔레트 모양을 하고 있다. 백사장 앞 갯벌에는 돌을 쌓아 만든 독살이 둥그렇게 원을 그린다. 독살은 물이 들고 나갈 때 빠져나가지 못한 물고기를 그대로 거두는 그물이다. 섬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길 옆 황토밭에는 겨울 초입에 심은 마늘과 대파가 한뼘 정도 자라 있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청산도는 농기계를 쓰지 않고 황소와 쟁기를 이용해 밭을 가는 촌부들이 농사를 짓던 마을이었다. 지금도 붉은 흙은 여전하지만, 더러 마늘밭 한가운데에 ‘펜션’과 ‘민박’ 건물이 들어서 있다. 슬로길로 지정된 이후 지난 수년 동안 청산도를 찾는 이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1코스는 5.7킬로미터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언덕을 내려와 2코스가 시작되는 곳에서 다시 해안 쪽으로 방향을 틀면 화랑포길이다. 화랑포는 섬 남서쪽에서 삐죽 튀어나온 반도로 벼랑을 따라 이어진다. 남쪽에서 들이치는 파도소리가 휘바람을 일으킬 정도로 세차게 들렸다.
2코스는 화랑포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당리와 구장리를 잇는 해안 절벽으로 난 길이다. 초입은 고즈넉한 소나무숲이다. 예전 사람들이 나무하러 다닐 때 말고는 걷지 않았을 것 같은 작은 길로, 자칫 이정표가 없다면 길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소담하다.
이 고즈넉한 길에는 ‘연애바탕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계절에 상관없이 둘이 걸으면 로맨틱한 분위기를 낼 수 있는 길이다.
소나무숲이 끝나면 다시 해안을 따라 걷는 벼랑길이 나타난다. 암벽을 딛고 걷는 길이라 오른편으로 난간이 설치돼 있다. 난간과 난간 사이에 걸쳐진 밧줄에 나무로 만든 하트가 걸려 있다.
벼랑을 내려오면 읍리앞개라는 작은 백사장이 있다. 거센 파도와 바람이 들이치는 작은 포구, 민가 한 채가 외롭게 자리 잡고 있다. 2코스의 끝으로 여기까지가 약 2킬로미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3코스는 고인돌길이다. 청산도 역사문화 자료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길로 당리를 감싸 안은 청산진성을 비롯해 고인돌, 하마비, 초분 등 청산도의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마을이다. 읍리앞개라는 작은 포구를 등지고 내륙으로 시선을 옮기니 산 아래 작은 마을이 보였다. 길은 다시 내륙으로 이어진다.
더러 길을 걷다 보면 초분을 만나게 된다. 초분은 ‘풀로 만든 무덤’으로 풍장(風葬)의 일종이다. 시신 또는 관을 땅 위에 올려 놓은 뒤 짚이나 풀로 엮은 이엉을 덮어두었다가 2~3년 후 뼈를 씻어(씻골) 땅에 묻는 전통 장례풍습이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효(孝) 사상의 내림으로 청산도를 비롯한 남해안 섬 일부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 3코스의 끝은 처음 시작했던 읍리앞개다. 여기서 다시 4코스가 시작된다.
로맨틱한 2코스와 역사·문화 새겨져 있는 3코스 ‘인기’
4코스 ‘낭길’은 구장리에서 권덕리까지 이어진 낭떠러지 길로 ‘하늘에 떠 있는 듯 바다에 떠 있는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슬아슬한 해안 절벽 위에 난 길로 마치 순례하듯 걷게 된다. 1.8킬로미터의 짧은 길로 중간에 ‘바람구멍’과 ‘따순기미’ 등 독특한 이름들이 눈에 띈다. 해안 절벽 중에서도 바람이 많이 부는 곳, 또 그 중에서 따뜻한 볕이 드는 곳을 그런 식으로 이름 붙인 듯하다.
길은 권덕리 마을회관에서 끝이 났다. 도청항에서 여기까지 약 15킬로미터. 보통 걸음으로 4시간 정도 걸리는 길이다. 오후에 섬으로 들어온 이들은 대부분 여기서 하룻밤을 묵는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인지 해가 지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내친 김에 5코스로 들어섰다. 안내원은 “범바위와 명품길을 걸어보라”고 일러줬다. 5코스는 권덕리에서 청계리까지 이어지는 길로 보적산(330미터) 8부 능선을 오르는 길에 만나는 범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범바위에는 섬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으며, 기상이 좋은 날에는 거문도·제주도까지 볼 수 있다.
슬로길은 범바위를 타고 보적산 능선을 넘고, 명품길은 범바위에서 내려와 해안으로 접어든다. 공룡알 해변이라고 불리는 해안에서 청계리 마을로 방향을 틀면 다시 슬로길과 연결된다. 공룡알 해변은 큰 몽돌이 깔려 이채로운 풍경을 가진 해안이다.
해안에서 30분 정도 들어오면 돌담과 돌담이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청계리 마을이다. 여기까지 약 20킬로미터. 빠른 걸음으로 걸어 5시간 정도 걸렸다. 오전에 섬에 들어와 오후 5시, 마지막 배 시간 전까지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글과 사진·김영주(여행 칼럼니스트) 2014.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