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집 그림을 그려보지 않으시는지요? 어릴 때부터 집 그림은 우리네 꿈과 욕망의 풍경에서 언제나 빠짐없이 등장하는 오브제였지요. 인간의 의식, 무의식을 드러내는 데 그만한 소재도 드물지요. 기본적으로 우리가 집 안에서 거주하는 존재인 까닭일까요?
도화지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릴 때뿐만 아니라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을 때도 그렇고, 또 레고로 만들기 놀이할 때도, 늘 집의 형상은 친근한 대상이었습니다. 집을 짓고 부수고 할 때 모래알이나 레고 조각 사이에서 우리들의 상상력은 참으로 찬연한 빛을 발하곤 했지요.
비단 어릴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제법 든 이후에도 늘 저는 새로운 집을 짓는 꿈을 꾸면서 끄적거리곤 했어요. 집짓기 놀이는 제가 좋아하는 취미이자 환상 놀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 그림 때문에 저를 심각하게 되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한 20년쯤 되었을까요. 그러니까 20세기 말의 언제쯤이었겠네요. 신영복 선생의 글 중에 감옥에서 경험했다는 목수의 그림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같은 감방에 목수 출신의 수인이 있었겠지요. 어느 날 신 선생은 그가 집을 그리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맨 먼저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올리고, 서까래를 엮고, 지붕을 올리는 식으로 실제 집이 지어지는 공정 그대로 그림을 그리더라는 것입니다. 목수가 집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또 집이 지어지는 순서대로 그리는 것이나, 전혀 이상할 것도 놀랄 것도 없는 일이지요.
그럼에도 신영복 선생은 매우 놀랐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네 일반은 집 그림을 어떻게 그리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붕부터 그리고 나서 기둥을 그리곤 하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부실 공사를, 아니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던 공사였음을 말없이 일깨워준 것이었으니까 말이지요. 사실 그렇지요. 기둥과 대들보와 서까래 없이 어찌 지붕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모래 위에 정각을 짓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나 산에서 물고기를 잡으려 하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못한 것이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실상에 부합한다는 것, 혹은 기본에 충실하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이에 기본적인 실수나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세기 말에 그런 반성을 신영복 선생을 통해 했습니다. 아마 정갈하면서도 아름답고 진실한 언어들이 어우러져 순수 영혼의 본모습을 거짓 없이 보여주는 그분 글의 특성 때문에 더욱 진실하게 반성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새해 들어 문득 그때 너무 평면적으로 반성한 게 아니었는지 새삼 재성찰하게 되었습니다. 목수의 패러다임만 진실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연목구어는 꼭 부황한 짓거리로 비난받아 마땅한가, 이런 질문 앞에 서게 된 것이지요.
디지털 가상현실이 새롭게 조성한 가상 실감은 존재론적 감각의 혁신을 전면적으로 요구합니다. 3차원의 현실에서 목수는 주춧돌부터 놓고 집을 짓지만 3D, 4D 속에서 사이버 예술가들은 얼마든지 지붕을 먼저 만들 수도 있는 것이지요. 연목구어나 사상누각도 그래요. 163층 828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를 보면서 우리는 사상누각이라는 말의 뜻 새김도 사려 깊게 수정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지요. 또 나무 위에서 고기를 잡으려고 엉뚱한 상상을 했던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빠르게 변화했는지 그 구체적인 예들을 새삼 들을 필요도 없겠지요.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다시 ‘구리거울’을 닦으며 ‘참회록’을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이리 반성할 거리들이 많은 것인지요? 어쨌든 오늘도 저는 구리거울을 닦으며, 새로운 집짓기 놀이를 해볼 작정입니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4.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