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지니 냉장고 문을 자주 열지 않게 된다. 냉동고에 얼음과자를 넣어 둘 일도 없으니 겨울 냉장고는 잘 쓰지 않는 가구처럼 느껴진다. 냉장고는 역시 여름에 필요한 것이구나 싶다. 문득 지난 여름 식중독으로 고생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내는 별다른 문제가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냉장고에 넣어둔 개봉한 지 며칠 지난 ‘단무지’를 먹었다. 그게 탈이 나 주말을 온통 설사와 복통, 두통 따위들과 몸싸움을 벌여야만 했다. 덕분에 아내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다녀야 했고, 진땀으로 샤워를 했다.
응급실 침대엔 아내 외에도 식중독으로 고생 중인 몇 사람이 파리한 혈색으로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하루 정도 더 고생할 거라며 일주일 정도는 음식 조절을 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아내는 끙끙거리며 침대에 쓰러져 일어나 앉을 줄 몰랐다.
식중독을 끝으로 여름을 그나마 무사히 지나왔지만, 여전히 아내는 냉장고에 들어간 음식을 의심했다. 하루이틀 지난 생수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코를 대 냄새를 맡아보았다. 식중독은 위장이 아니라 생각에 ‘트라우마’를 남겼다.
아내는 겨울에 와서도 올해 초 구입한 냉장고가 이상하다며, 점검을 받자고 졸랐다. 문제가 없다는 걸 납득시키는 데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이제 겨울이니 괜찮다고 여러차례 말한 끝에서야 아내는 한숨을 내쉬며 냉장고를 가볍게 한 대 치고는 물러났다. 아내의 의심스러운 시선을 일상적인 눈으로 되돌리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사실 냉장고는 음식의 부패를 지연시켜 신선함을 유지·지속시키는 장치다. 하지만 이는 냉장고 안팎을 완전 차단해야만 가능하다. 그러니까 주변 기온이 어떻게 되든 냉장고에 문제가 있다면 겨울에도 냉장 기능이 제 역할을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냉장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부패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음식물이 이미 썩었음에도 그것이 상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다만 겨울이니 괜찮겠지라고 믿어버린 것일 수 있다.
냉장고와는 달리, 세계를 냉장시키는 겨울은 좀 다른 방법을 쓴다.
겨울은 냉장고와는 달리 가을에 숙성한 과실이 오히려 천천히 ‘부패’하도록 만듦으로써 과실 속 씨앗이 발아하도록 만든다. 달리 말해 겨울은 부패를 생명의 가능성으로 이어주는 자연의 리듬이다. 그래서 겨울은 부패를 새로운 생명으로 연장시키는 좀 더 큰 저장고다.
썩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냉장고의 테크놀로지가 도리어 죽음을 자초하는 방식이라면, 썩음을 내내 지속하도록 만드는 겨울은 죽음을 삶으로 되돌리는 방식이다. 김장이 겨울 속에서 빨갛게 익는 것처럼.
글·김만석(미술평론가) 2014.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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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