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7월 17일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태조 이성계가 개성의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새로운 왕조 조선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 후 천도(遷都)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도읍지에서 새 왕조를 열어가려는 의지에서였다.
475년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고려왕조의 신하들이 많은 피를 흘렸던 곳이고, 고려 귀족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도읍지로서는 적절치 못한 점이 있었다. 개성 땅의 기운이 쇠했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조는 천도를 지시하고 후보지를 찾게 하였다. 그렇게 해서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됐다.
한양으로 결정된 데는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점, 고려시대에도 남경이라 하여 수도에 버금가는 기능을 한 곳이라는 점, 주변에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국방상으로도 매우 유리한 지역이라는 점이 큰 작용을 했다.
하지만 이때 왕궁을 어느 방향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왕사(王師)인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였다. 무학이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자 정도전은 국왕은 남면(南面)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할 것을 주장했고,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신도시 건설이 추진되었다. 현재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서울의 기본적인 골격이 갖추어진 것이 바로 1394년 10월의 한양 천도였다.
이후 왕실이 거처하는 궁궐 조성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한양의 북쪽에 우뚝한 산 북악 남쪽의 평평하고 넓은 터에 내전 173칸, 외전 192칸, 기타 390여 칸 등 총 755칸 규모의 새 궁궐이 처음 세워진 때는 1395년(태조 4년) 9월 29일이었다.
태조는 같은 날 낙성된 종묘에 4조(祖)의 신위를 개성으로부터 옮겨모시고 친히 새 궁궐을 살핀 다음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한껏 거나해진 태조는 최고의 참모 정도전에게 새 궁궐의 이름과 각 전당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였다. 정도전은 <시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미 술을 마셔서 취하고 큰 은덕으로 배부르니 군자께서는 만년토록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의미로 궁궐의 이름을 경복궁으로 정했고 태조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태조는 경복궁으로 이름을 지은 지 약 3개월 후 점을 쳐서 길일로 잡은 12월 28일 마침내 이곳에 들어가 살았다. “군자 만년 큰 복을 누리리라”는 칭송으로 가득했던 경복궁은 태조가 들어가 산 지 채 3년도 못가서 태조의 아들들 간에 골육상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왕자의 난’이 일어난 비극의 공간이 되고 말았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조선은 경복궁 조성 후 종묘와 사직을 비롯하여 의정부, 6조, 한성부 등의 관청과 시장을 배치하여 도시의 골격을 완성하였다. 1394년 한양천도 이후 서울은 지금까지 620년간 대한민국의 수도로 자리한 까닭에 세계적으로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대표적인 도시가 되었다.
620년 전 한양의 모습을 기억하며, 2014년 서울의 도심 거리를 거닐어 볼 것을 권한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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