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상으로는 전주와 광주 사이 그 어디쯤, 철도선상으로는 호남선의 중간쯤에 위치한 정읍. 그 이름에서부터 왠지 구구절절한 촌의 살림살이가 보이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사실 정읍은 나의 친가가 오래도록 터를 잡았던 곳으로, 내 아버지의 고향이자 서울 출신인 나에게도 마음의 고향쯤으로 생각되곤 하는 곳이다.
어릴 적 방학만 되면 으레 정읍의 할머니집에 우리 남매를 한달이나 맡겨놓으시곤 하던 아버지가 서울에서 태어난 남매에게 심어준 시골의 특별한 정서. 사촌들과 합세해 자주 뒷마당 텃밭을 쑥대밭으로 망쳐놓고 대나무를 깎아 대검을 만들어 허리춤에 차고 다니며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내 키보다 큰 할아버지의 녹슨 자전거를 단체로 훔쳐 타다 도랑에 빠져 다리가 부러지는, 켜켜이 쌓은 추억들이 새록새록하다.
무궁화호에 유년의 기억을 싣고
볼이 빨갛게 얼어터지도록 찬바람 맞으며 뭘 하는지도 모르게 한참을 뛰놀다가, 해가 진 푸르스런 들판 위로 무언지 모를 연기들이 피어오르는 저녁이 되면 “밥 묵으라~” 외쳐대며 허기진 우리들을 불러모으던 할머니의 호령. 서울 촌놈(?)인 내가 시골을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망각으로는 결코 지울 수도 없고, 때때로 환영처럼 거물거물 스며드는 그런 유년의 기억들 때문일 테다.
용산역에서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정읍으로 내려가는 길은 그래서 뭔가 색다른 기분을 안겨주었다. 취재가 아니라 마치 오래된 고향으로 내려가는 듯한 착각. 늘 자가용을 타고 갔을 뿐 단한 번도 혼자 기차를 타고 정읍에 가본 기억이 없어서 그 여정은 더 생소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으로 옮기시면서 폐허가 되어 어쩔 도리도 없이 팔아버리고 만 정읍의 200년도 넘은 내 유년의 ‘대궐’ 같은 시골집은 이제 기억 속에만 살아 있다. 몇 년 만에 취재를 핑계 삼아 부러 찾아가보는 고향. 어쩌면 더 이상은 갈 일 없게 된 고향에 이렇게라도 발을 디뎌보는 건 새해에 불쑥 떠오른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팥 가득 든 바람떡 하나 얻어먹자고, 할머니 쪼글쪼글한 손 붙잡고 털털대는 시골버스를 신나게 달려 만났던 그 재래(전통)시장은 여전할까, 어떨까.’ 왠지 모를 설렘으로 정읍역에서 20여 분을 걸어 100년이 다 되었다는 정읍샘고을시장에 닿았다.
정읍샘고을시장은 이래봬도 전라북도에서 제일 가는 시장이다. 국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1914년에 처음 문을 열어 그 역사가 100년을 자랑한다. 백 살이 된 노숙한 시장은 그 역사를 증언하듯 오래된 대장간과 순댓국밥집, 뻥튀기 아저씨를 그대로 품고 있다. 가게들 중에는 대를 이어 장사하는 집도 있고 새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집도 있지만 100년 된 시장은 어딘지 모를 깊이를 가졌다.
정읍샘고을시장의 원래 이름은 정읍 제1시장이었다. 정읍에서 제일 크다고 해서 일제 강점기 때 관료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었는데 이를 새로 바꿔 샘고을시장이 되었다. 시장이 있던 자리에 샘이 많아 샘이 있는 고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2·7일 5일장이었다가 시장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아 지금은 상설시장으로 바뀌었다. 2·7일에 가축시장이 추가되는 점만 빼면 매일이 시끌벅적한 장날이다. 점포는 280여 개나 되고 그 안에서 장사하는 상인의 수만 500명이 넘는다. 시장 주변에서 무시로 펼쳐지는 촌부들의 난전까지 합치자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시장은 매일매일 사고파는 사람들의 생기로 넘친다.
왁자지껄… 들썩들썩… 생동감이 넘친다
난전 할머니들의 꼬부랑 등은 언제부터 저렇게 휘어졌는지, 몇푼 벌자고 하루종일 온 몸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 나물 다듬기에 여념이 없다. 장사가 곧잘 되는 생선전에서는 거친 입씨름도 오간다. 그렇게 한참 시장을 돌아다니다 보니 왠지 머쓱해진다. 백 살 노인이 어린애 꾸짖듯, 일상에 쉽게 지쳐버리는 나를 나무라는 소리가 들린다. 삶의 깊은 속일랑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 삶의 껍질들에 지쳐가느냐고.
시장은 다이내믹하다. 장거리를 보러 온 주변 마을사람들과 외지인들로 늘 붐빈다. 꽤 멀리서도 찾아올 만큼 정읍샘고을시장엔 살거리, 볼거리, 먹을거리가 넘친다. 시장 안에는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는 장이 아니라 없을 것 같은 것도 있는 장이다. 농수산물을 비롯해 축산물과 가공식품점이 즐비하고 오래된 음식점들과 방앗간, 떡집, 철물점과 생필품점들도 저마다 제자리를 잡고 있다.
“한움큼 더 주이소. 천원만 깎아주든가~.”
“아따~, 요 쬐만 봉다리에 없는 인심까지 솔찬히 넣었구만, 더는 안 된다이~.”
장 보러 나온 아주머니와 상인의 옥신각신 흥정이야말로 재래시장의 오래된 묘미다. 시장에만 존재하는 그 투박한 생명력과 에너지. 장은 무엇을 사거나 팔러 오는 곳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서로가 부대끼며 정을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유행가 가사처럼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면 ‘님’이 되듯이, ‘장’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바꾸면 ‘정’이 되는 이치랄까.
무시로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정을 나누는 장, 먼 세상의 새로운 뉴스를 듣기도 하고 이웃 간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이야기를 한 소쿠리씩, 한 포대씩 풀어놓는 ‘장’이다. 시장은 그렇게 서로 마주보며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정들어가는 만남의 장소이자 서민의 광장이다.
방앗간 골목에는 10여 개의 미용실이 한 집 건너 한 집이다. 영화 제목 같기도 한 ‘방앗간 옆 미용실’. 방앗간에 쌀이나 고추를 빻기 위해 맡겨놓고 기다리는 동안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꼬불꼬불 파마를 한다. 장 나온 김에 장도 보고 머리도 한다. 기다리는 시간 지루하지 않게 미용실에서 오랜만에 본 ‘아지매’들과 한판 수다도 떤다. ‘아자씨’들이 순댓국밥집에서 소주 한잔 기울이며 설왕설래하는 동안 아지매들은 미용실에서 설전을 펼친다. 한참 ‘이바구’를 떨고 나면 한 반년은 꼬불꼬불하게 유지될 ‘아줌마 파마’도 완성되고 방앗간에 맡겨놓은 곡식들도 희뽀얀 얼굴로 기다린다.
언제나 제자리인 50년 넘은 맛집·100년 대장간
구경할 것은 또 있다. 100년은 됐음직한 대장간에서는 담금질이 한창이다. 운이 좋으면 두드리고 때리며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장이 아저씨도 직접 만날 수 있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뻥튀기 아저씨의 뻥튀기 기계도 적잖이 골동품이다. 그 숱한 세월 동안 “뻥~이요” 를 외치며 뻥튀기를 튀겨내고 있는 아저씨의 고막이 무사할까 걱정이지만 아저씨는 외려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 놀랄까 더 안달이다. 사든 안 사든 방금 튀겨낸 뻥튀기 한움큼 집어먹으며, 마트의 시식 코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재래시장의 구수함을 느낀다.
맛집도 즐비하다. 50년 넘은 순댓국밥집 ‘화순옥’이 있고 팥죽을 기막히게 끓이지만 1인분은 안 판다는 야속한 ‘옛날팥죽’도 있다. 쫀쫀한 떡맛으로 이름난 ‘민속떡집’과 ‘솔나무떡방앗간’에서는 꼭 쑥이 그득 들어간 개떡을 맛볼 일이다.
재미 삼아 마실 삼아 장도 보고 사람 사는 구경도 하고 나면, 치열하지만 정스러운 삶의 한 조각까지 덤으로 장바구니에 담긴다. 몸 편한 마트 대신 마음 편안한 시장. 설탕 가득 넣은 달달한 팥죽 한 그릇, 얼큰한 순댓국밥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이면 자잘한 아픔쯤이야 토해내지 않고 목구멍으로 넘겨버릴 수 있을 것만 같고, 사는 맛도 어쩐지 그럴싸하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4.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