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멀리 떠나왔습니다. 수은주는 영하 35도를 가리키지만, 바람 따라 몸으로 다가오는 온도는 영하 43도입니다. 군 복무 시절 혹한기 훈련 때도 체험하지 못했던 온도여서 당혹스럽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합니다. 캐나다 노스웨스트 준주의 주도(州都)인 옐로나이프.
이곳에 이틀 전에 왔습니다. 유콘 준주의 주도 화이트호스와 더불어 오로라를 보기에 최적지로 알려진 곳이지요. 신년 벽두에 태양 흑점이 폭발하여 오로라 활동이 매우 왕성할 것이라고, 십수년 만에 오는 왕성한 시기라고, 그런저런 뉴스를 접한 다음에 홀린 사람처럼 우정 비행기 표를 구해 찾아든 것입니다.
오로라를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세상의 모든 꿈은 무지개로 통했던 것 같습니다. 무지개를 좇아 하염없이 떠나는 꿈을 꾸며 자랐지요. 10년 전 마우이 섬해안가에서 너무나도 황홀한 쌍무지개를 본 다음이었을까요, 오로라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 로마 신화에서 ‘아우로라’는 오리온이 사랑했던 여명의 여신이었지요. 밤하늘에서 영혼의 소나타를 연주하며 춤추는 것 같은 특별한 빛의 향연을 발견한 17세기 프랑스 과학자 피에르 가센디가 ‘오로라’라고 이름 붙였다지요.
이틀 전 이곳의 원주민 오로라 헌터와 함께 밤길을 떠났습니다. 다운타운을 벗어나 인공 빛의 방해를 받지 않는 공간을 찾아 이른 곳이 매들린 호수입니다. 물론 꽝꽝 얼었고 하얀 눈으로 덮여 호수라기보다는 평원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북위 62도54분76초. 이렇게 먼 북쪽은 처음입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구름 사이로 그만 눈이 내리지 뭡니까.
참으로 속상했습니다. 오로라를 볼 가능성이 줄어드니까요. 눈은 그칠줄 모르고 오로라는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여 첫날은 실패.
어제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연이어 관측 불발. 도대체 어떤 풍경을 연주하려고 이토록 뜸을 들이는 것일까요. 아니면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일까요.
오랜 옛날 가락국 사람들이 수로왕을 맞을 때 불렀다는 ‘구지가’가 떠오릅니다. 그런 주술 노래라도 불러야 하려나 생각하는 순간, 동쪽 지평선으로부터 기운이 느껴집니다. 연녹색 빛의 기운이 서서히 하늘을 향해 치솟더니 서쪽까지 확 뻗칩니다. 오로라입니다. 선 자세로는 한눈에 담기 어려워 아예 눈 위에 드러눕습니다. 오로라가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오리온자리 가까이에서 소용돌이치듯 격렬하게…. 그러다가 서서히 북쪽으로 범위를 넓혀갑니다. 넓어지면서 색조가 약간 희미해집니다. 그러다가 다시 좁아들면서 녹색의 기운을 더합니다. 누운 자리에서도 다 볼 수 없습니다. 부지런히 몸을 좌우로 굴리면서 춤추듯 보아야 오로라의 춤사위를 가깝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오로라가 춤추고 지나간 하늘에 별들은 여전히 밝게 빛납니다. 그 별들을 헤어보며 윤동주를 떠올립니다. 가족을 떠올리고 벗들을 떠올리고, 릴케를 떠올리고, 그러다가 루카치를 떠올립니다. 유럽 사람들이 황금기로 여기는 고전 그리스 시대에는 별의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나설 수 있었는데, 근대 이후 그 별의 지도를 잃어버렸다고 한탄했지요. 오로라가 연주하는 푸른 밤의 여로에서, 문득 그 별의 지도를 다 잃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문학부 교수) 201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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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