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군산은 항구 주위로 펼쳐진 거리 모습만 보면 아직 근대에 속한 도시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쓰지 않는 옛날 철길이 도시와 건물을 관통해 흐르고,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구 조선은행이나 구 군산세관이 여전히 항구를 바라보며 버티고 섰다.
어쩐지 ‘군산’이라는 이름에서마저 현대와는 다소 동떨어진 근대의 항구 냄새가 풍기는 듯도 하다.
항구도시라는 점만으로도 묘한 매력이 있다. 열지어 선 배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당장이라도 짐을 꾸려 어딘가로 떠나야만 할 것 같고 갑작스레 ‘뿌~웅’하고 경적이라도 울리며 누군가 반가운 사람이 돌아오고 무언가 이국의 물건이 도착할 것만 같다. 겨울 바다 특유의 시퍼런 일렁임도 여행자에게는 설렘이다.
군산 구도심 곳곳에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적산가옥도 종종 눈에 띄고, 지금은 박물관이나 역사관으로 만들어놓은 식민시대의 건물과 상징도 즐비하다. 미곡을 수탈하던 옛 철길도 눈에 선하다.
군산의 구도심에 펼쳐진 근대의 흔적들을 덤으로 갖가지 먹을 거리를 찾아 다니는 ‘먹자여행’, 그것도 이것저것 다양하고 소소하게 맛볼 수 있는 ‘간식여행’이다. 군산에서는 길거리의 흔한 간식도 40년 구력을 쉽게 넘긴다.
‘항구의 도시’가 식객들에겐 ‘짬뽕의 도시’
군산 구도심을 기웃거리다 보면 짬뽕으로 이름난 중국집을 여럿 만난다. 추운 겨울에 먹는 얼큰하고 뜨끈한 짬뽕 한 그릇은 추위를 녹이고 속을 든든히 채워준다. 블로그를 통해 유명해진 몇몇집은 특히 더 문전성시다. 주말에는 한 시간 이상을 기다리기도 한다니 대한민국 어디서나, 또 집에서 배달음식으로 흔히 먹을 수 있는 짬뽕에는 대단한 영광이다.
군산에 중국집이 많은 이유는 1800년대 말 개항을 하고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이곳에 터를 잡은 화교들이 많았던 탓이다. 항구도시다 보니 다른 도시에 비해 외국인의 출입이 자연스럽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짬뽕이 유명해진 이유는 바다를 곁에 둔 덕분이다. 짬뽕에 해산물을 듬뿍 넣어 시원한 감칠맛을 살릴 수 있었다.
현재 여러 중국집 중에서 복성루·쌍용반점은 외지 사람들에게 더 유명한 집이고 영화원·서원반점·빈해원 등은 군산시민들이 추천하는 맛집이다. 복성루는 돼지고기 고명을 올린 짬뽕으로 유명하고 쌍용반점은 해산물 그득한 얼큰한 짬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여행자라면 누구나 이렇게 많은 짬뽕집 중에서 어느 집으로 들어갈까를 고민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자극적인 맛보다 은근한 맛을 좋아하고 뜨내기 손님보다는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집이 더 믿음직스러워 외지인보다는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짬뽕집을 골랐다.
고풍스러운 옛날 집 구경까지 덤으로 할 수 있는 빈해원이다. 주문한 음식은 짬뽕과 물짜장. 삼선짬뽕은 얼큰하고 푸짐하다. 또 춘장이 들어가지 않고 잡채밥처럼 담백하면서도 찰기가 있는 물짜장에는 버섯과 각종 야채가 가득 들어간다.
2대째 화교가 운영하는 빈해원은 짧지 않은 역사를 자랑한다.
1951년부터 운영했으니 그 나이도 주인들처럼 환갑을 넘었다. 중국식 인테리어를 그대로 보여주는 내부에 들어서면 마치 중국의 어느 식당, 그것도 근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인다. 전통적인 중국 스타일의 식당에서 맛보는 짬뽕 한 그릇은 군산 여행의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거리를 지나다 한무리의 교복 입은 학생들에게 군산에서 제일 맛있는 게 뭐냐고 물으니 생소한 답이 돌아온다. 군산의 명물 중 하나는 바로 잡탕이란다. 이름이나 그 모양만 보면 생선탕 같지만 잡탕은 사실 군산의 여고생들이 즐겨 먹는 분식이다.
잡탕은 떡볶이와 만두·오뎅·달걀·쫄면·라면 등을 한데 넣고 얼큰하게 끓여낸 후 깻잎을 고명으로 올린 탕이다. 떡의 종류나 만두의 종류, 오뎅의 종류도 다양하다. 맛이 비슷하다고 해도 다양한 모양과 식감의 재료가 들어간다.
떡볶이·만두·오뎅을 한데 넣고 끓인 잡탕
떡도 떡국떡부터 떡볶이떡, 절편 등이 다양하게 들어가고 만두도 찐만두와 물만두 등이 함께 들어간다. 그야말로 섞어분식이다.
이 잡탕의 특징이란 것이 커다란 뚝배기에 끓여내는 것인데 덕분에 뚝배기의 깊은 맛을 분식에서 느낄 수 있다. 청소년기에 잡탕을 즐겼던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잡탕집을 찾는다.
100여 년의 세월 속에서 항구도시답게 다양한 국적의 문화와 사람들을 흡수해야 했던 군산의 역사를 반영하듯, 모두 한데 넣고 끓인 잡탕의 맛은 걸쭉하면서도 진하다.
어느 하나의 재료가 튀기보다는 다양한 분식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내는 자연스러운 그 맛이 군산을 닮았다. 얼핏 별것 아닌 분식 같아 보여도 군산의 잡탕 역사는 40년을 넘겼다. 모양은 찌개여도 가격은 분식 가격을 유지한다. 둘이서 8천~1만원이면 배를 든든히 채운다.
군산에는 70년 된 호떡집도 있다. 중동에 있는 중동호떡이다.
이 호떡 하나를 맛보자고 군산에 오는 여행객도 있다니 군산에 온 이상 맛보지 않고 갈 수 없다. 내항에서 경암동 철길마을로 걸어가는 길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흔히 포장마차에서 파는 호떡을 상상하고 찾아간 중동호떡집은 멀끔한 가게였다. 원래는 바로 앞의 허름한 집에서 시작했다는데 호떡으로 제법 돈을 벌어 번듯한 건물까지 산 모양이다. 호떡집에는 먹고 갈 수 있는 테이블도 3~4개 있고, 깨끗한 화장실에 무료 커피자판기와 정수기까지 갖췄다. 먹고 간다고 했더니 호떡을 종이컵이 아닌 접시에 담아준다. 먹는 법도 일반 호떡과는 다르다. 테이블에서 먹고 가는 사람들에게 1인당 집게 두 개씩을 주는데, 집게 두 개로 호떡 윗면을 양쪽으로 찢어서 윗면의 피를 먼저 벗겨내 먹는다. 이때 윗면의 피를 안에 든 꿀(물론 진짜 꿀은 아니고 흔히 호떡 안에 들어가는 설탕시럽이나 묽은 엿)에 찍어서 먹는다.
번호표 뽑아 줄 서서 사먹는 호떡집 아시나요?
어쨌든 좀 독특한 맛이다. 끈적이지 않고 깔끔하며 달달하다. 중동호떡은 중국식 호떡으로 구워져 나와 담백하다. 보릿가루를 섞어 반죽을 하기 때문에 구워져 나온 호떡은 텁텁하지 않고 쫄깃하다. 먹는 법만 잘 안다면 흘러 넘칠 정도로 흥건하게 들어 있는 꿀도 매력이다. 호떡 안에 든 꿀은 진한 갈색빛을 띠는데 흑설탕과 각종 곡물 가루를 섞어 체에 친 것을 사용한다고 한다. 단, 포장해 가면 맛이 훨씬 덜하다. 중동호떡을 한번 맛본 사람이라면 또 찾을 만하다.
사실 짬뽕이니 분식이니 호떡 같은, 어디서나 맛집도 흔하고 싼 음식들을 먹자고 여기 군산까지 달려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저 여행의 작은 핑곗거리를 주고 싶을 뿐. 아무 목적 없이도, 혹은 한 끼의 식사를 위해서도 기차를 탈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