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의 <꽃>은 잘 알려진 국민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이 시는 놀랍도록 간결하고 웅숭깊게 존재와 본질을 더듬고 깨우쳐 준다.
우리 시문학사의 자랑인 이 시는 우리 교육 현장에서 늘 새겨 보게되는 잠언이기도 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은 언제나 경탄스럽다. 팔순이 넘으신 아버님이 순식간에 쩔쩔매는 떠꺼머리 소년으로 돌아가는 때도 겨우 여섯 살 더 연상이신 고교 은사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이다. 이름은 존재와 본질의 입구이자 출구다.
하지만 요즘은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기가 힘들다. 신임 교사 시절에 30분도 안 되어 외웠던 학급 학생들 이름을 이제는 마음먹고 외워도 30분도 안 되어 까먹기 시작한다. 조기 치매인가 고민도 되고, 학생의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교사가 과연 자격이 있을까 종종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물론 자기합리화를 하기 위한 근거들은 적지 않다. 먼저 서로 비슷한 유행의 옷과 머리는 오히려 두발과 교복으로 획일화했던 과거보다 더 고만고만한 느낌을 준다. 과거의 획일성이 강제적인 힘으로 윽박질렀다면 이제는 상업적인 유혹으로 꾀는 것만 다르다. 학생 앨범을 보면 얼굴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서로 비슷하다. 이를테면 ‘땜통’이나 ‘짱구’, ‘합죽이’, ‘안경잽이’ 등은 이제 찾기 어려운 별명이요 존재일 뿐이다.
또한 수준별이다 맞춤형이다 하며 나누다 보니 학생과 교사가 서로 오래도록 응시할 기회가 없다. 칠판과 선생님만 바라보던 학생들의 눈길은 수시로 흩어지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교사는 학생의 얼굴과 언행을 살펴야 할 시간에 십수쪽이 넘게 입력해야 하는 생활기록부 화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더구나 학생들을 가르친 지 30년이 가까워 오니 이제 졸업생들의 이름과 얼굴이 서로 섞여든다. 가령 전화기에서 “저, 김동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10명이 넘는다. 순식간에 뒤죽박죽이다.
지난 연말부터 붓으로 이름을 쓰고 있다. 처음에는 대입에 실패한 제자들 이름을 썼다. 앞으로 잘되라는 마음이 절로 담기며 이런 정도 시련은 능히 극복하리라는 기대를 더하였다. 초등학교 때 붓 잡는 법 배우고 화선지 망치던 기억밖에 없었다. 글씨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지난 1980년부터 타자를 배웠기에 그나마 더 엉망이 된 글씨는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문자 메시지로 이름을 찍어 보내는 것보다는 진심이 담기겠거니 쓰고 또 써보았다.
충격스러울 정도의 악필이지만 붓의 섬세하고 풍부한 느낌이 점차 느껴져 오기에 용기를 내 몇몇 학생들에게 휴대폰으로 살짝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제자들이 너무나 좋아하였다. 정말 감동했다는 문자를 보내왔고 전화를 직접 걸어와 감사하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이름은 존재와 본질의 신비한 블랙홀이자 화이트홀로서, 우주 삼라만상의 존재와 본질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름 부르기, 종이에 적고 휴대폰으로 사진 찍어 보내주기로도 가능하다. 붓으로 이름을 수없이 쓰다가 한 장 건져올린 당신의 이름, 상대의 호흡과 손떨림, 진심을 느끼고 싶은가? 그럼 먼저 써라!
이왕이면 붓으로! 휴대폰으로 보내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완벽하고도 행복한 조화가 된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디지털 시대에 이름을 다시, 새롭게 부르는 순간 우리의 존재와 본질은 또 한번 놀라운 진화를 할 것이다.
글·허병두(숭문고 교사·책따세 대표)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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