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8년 6월 조선의 3대왕 태종은 14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장자 양녕대군(1394~1462) 대신 3남 충녕대군(1397~1450)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두 달 후인 8월 충녕대군은 태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4대 왕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세종을 즉위시키는 데는 태종의 의지가 절대적이었다. 태종은 이제 겨우 기틀을 다진 조선왕조를 더욱 굳건히 유지시켜 줄 인물로 충녕대군을 지목하였고, 이 선택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조선왕조의 왕위 계승은 장자 세습이 원칙이었다. 태종의 부인 원경왕후 민 씨는 1394년 장자 양녕대군 제(?)를 낳았고, 1404년 8월 태종은 11세의 양녕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1418년 세자의 자리에 있던 양녕대군은 폐위되어 경기도 광주(廣州)로 추방되었다. 황희 등 조정의 원로 대신들 중 일부가 반대했지만 태종의 강한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다. 세자를 대신하여 그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방안도 잠시 논의되었으나 택현(擇賢), 즉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 태종은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삼았다.
14년 동안 왕세자의 신분에 있었던 양녕대군이 폐위된 까닭은 무엇보다 부왕인 태종과 성격이 맞지 않았다는 데 있다. 치밀하고 엄격한 성격의 태종에 비해 양녕은 호방하면서도 풍류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태종은 세자가 학업을 게을리한다며 세자를 대신하여 환관들에게 태(笞·매)를 치기도 하는 등 노력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양녕대군이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궁궐에 건달패나 기생들을 들인다는 소문이 현실로 드러나자 태종의 분노는 극에 이르렀다. 정종의 애첩이었던 기생 초궁장과 사통하는가 하면,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於里)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도적질하여 궁궐에 들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행들이 계속되자 마침내 태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받는 절차를 취하여 1418년 양녕을 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양녕의 폐위에 결정타가 된 사건은 어리와의 스캔들이다. 태종은 어리가 양녕대군의 아이까지 갖게 되자 이에 대한 극도의 실망감을 표하면서 폐위를 결심했다. 태종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자의 폐위를 결정한 것에는 양녕의 기행(奇行)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셋째 아들 충녕에 대한 믿음이 큰 작용을 했다. 항상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로 학문에 열중하는 충녕의 됨됨이를 알고 있던 태종은 자신의 후계자로 그를 선택한 것이다.
태종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국왕의 자리는 장자 세습이라는 원칙보다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이것은 ‘택현’이라는 논리로 합리화되었다. 태종은 자신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왕위를 물려주는 등 충녕에게 최대한 힘을 실어주었다.
‘조선 최고의 선택’ 세종은 왕위에 올라 우리 역사상 최고의 시대를 연출하면서 원칙보다는 실리를 택한 아버지의 기대에 적극 부응하였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4.02.10
K-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