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번 엑스레이 한 장 부탁합니다.” “34번에 충치가 있네요.” 최근 초등학생인 아들과 치과병원을 찾은 주부 C씨는 의사와 간호사, 방사선 기사 등이 암호처럼 숫자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했다. 치아를 가리키는 숫자인 것 같긴 한데,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3번 치아의 정식 명칭은 ‘상악 우측 송곳니’다. 34번은 ‘하악 좌측 제1소구치’를 가리킨다.
사실 치과가 아니더라도 군대나 과학기술자들 사이에서는 숫자로 ‘소통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숫자 대화는 의미가 명료하고 간단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특히 전문가들이 애호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숫자 소통’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까지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고속도로(고속국도) 번호 표기가 대표적이다.
고속도로 운전을 많이 해 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홀수는 남북으로 짝수는 동서로 달리는 고속도로를 뜻한다. 예를 들면 인천과 강릉을 동서로 잇는 영동고속도로는 50번으로 짝수다. 또 전남 무안과 서울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서해안고속도로는 15번이다.
고속도로의 주요 노선은 짝수든 홀수든 두 자리 숫자 표기가 기본이다. 다만 대도시 주변 순환도로나 주요 노선에서 갈려 나오는 지선은 세 자리 번호가 주어진다. 100번인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나 300번인 대전 남부순환고속도로가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고속도로에 세 자리 숫자를 매길까. 답은 우편번호에 있다. 100번의 1과 300번의 3은 각각 서울과 대전의 우편번호 첫 자리에서 따온 숫자다.
순환도가 아닌 지선은 주요 간선노선 번호의 끝에 숫자 하나를 더 붙여 세 자리 숫자로 표기된다. 대전과 논산을 잇는 251번 호남고속도로 지선이 한 예이다.
이 고속도로는 25번인 호남고속도로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남북으로 달리기 때문에 홀수로 표시돼야 하므로 ‘25+1=251’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은 드문 법. 간선 고속도로 숫자 표기는 두 자리가 기본이지만 우리나라 고속국도 1호인 경부고속도로만큼은 1번으로 한 자리이다. 또 인천과 서울을 동서로 잇는 110번, 120번, 130번 도로도 다소 예외적으로 숫자가 매겨진 경우다. 이들 3개 노선은 100번인 서울 외곽순환도로에서 갈라져 나왔지만, 네 자리 숫자가 아닌 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 이들 도로에서도 짝수 도로일 경우 남쪽보다는 북쪽에 위치한 도로의 숫자가 더 커야 하는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110번이 제일 북쪽, 120번이 그 다음, 130번이 제일 남쪽인 것이다. 또 동서 방향일 때는 짝수라는 원칙도 적용되고 있다. 한편 일반 국도 또한 고속도로와 번호체계가 비슷해 동서로 달리는 것들은 짝수, 남북으로 달리는 것은 홀수이다. 고속도로와 큰 차이는 세 자리 숫자 없이 1~99번까지만 부여된다는 점이다.
고속도로와 유사한 맥락에서 올해부터 본격화된 도로명주소 시스템도 숫자 붙이기(numbering)에 그 나름의 원칙이 있다. 종각으로 널리 알려진 보신각의 주소는 ‘서울 종로구 종로 54’이다. 동서로 난 길은 남쪽에 짝수 번호를 부여하므로, 보신각은 종로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또 주소의 숫자는 동쪽으로 갈수록 커진다. 보신각 동쪽의 한 산부인과 건물 주소가 ‘종로 60’으로 54보다 큰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세종대로처럼 남북으로 난 도로는 서쪽 건물에 홀수 주소가, 동쪽에 짝수 주소가 매겨진다. 그리고 이들 숫자는 북쪽으로 갈수록 커진다.
차량 내비게이션이 발달한 요즘이지만 도로 주소와 번호 체계를 알면 한층 더 확신을 갖고 길을 찾아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서로 이어진 서울의 남부순환로 어딘가에 위치한 카페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는데 카페 주소가 홀수라면 길의 북측에만 신경 쓰고 길을 더듬어 가면 된다.
글·김창엽(자유기고가) (도움말 : 한국고속도로공사 이창희 대리) 201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