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들뜬 마음으로 학교에 온 학생들에게 채변봉투를 나눠주며 자신의 변을 담아오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모르긴 몰라도 거센 항의가 빗발칠 것이다. 요즘 학생들에게는 이름조차 낯선 채변 봉투에는 엄마 아빠의 학생 때 추억이 오롯이 남아있다. 1960년대 이후 채변(採便) 활동은 학생들이 봄과 가을이 되면 치러야 했던 연례행사였다. 기생충이 많았던 그 시절, 채변 검사에서 기생충이 나온 학생들은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친구들의 놀림을 받으며 회충약을 먹어야 했다. 지금은 사라진 지난날의 교실 풍경이다.
한국기생충박멸협회(현 한국건강관리협회)의 ‘단가 입찰공고’(매일경제신문 1983년 1월 6일)를 보자. 이 공고성 광고에서는 월간으로 발행되는 협회지, 비닐 봉투를 포함한 채변 봉투, 요충 검사용 핀 테이프를 입찰에 부치고 있다. 채변 봉투의 수량은 자그마치 1,359만6천장이나 된다. 전국에 걸쳐 기생충 검사를 실시했다는 확실한 증거다. 입찰 보증금으로 “입찰 금액의 100분의 10 이상의 현금 또는 시중은행 발행 자기앞수표”를 요구했으니, 입찰에 응하려면 상당액의 자금도 필요했으리라.
채변 봉투의 겉면에는 채변 요령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반드시 본인의 변을 받고, 비닐 봉투에 넣을 때 봉투 입구에 변이 묻지 않게 하며, 소독저로 세 군데 이상 밤알 크기로 떠내고, 넣은 변이 새어나오지 않게 비닐 봉투를 실 같은 것으로 봉하라는 주의사항이었다. 시인 안도현은 <밤알 크기에 대한 성찰>이라는 에세이에서 “‘채변 시에는 소독저로 세 군데에서 밤알 크기만큼 떼어내어 봉투에 담으십시오’라는 대목이 지금까지도 풀지 못한 난해한 숙제였다”고 추억했다. 이미 오염된 똥을 왜 소독저로 떼어내라고 하는지, 밤알이 다 다른데 ‘밤알 크기’란 과연 얼마만한 크기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시절 채변 봉투를 가져오지 않은 학생들은 선생님께 벌을 받기도 했다. 깜빡 잊고 온 학생들은 친구 것에서 덜어내 제출하기도 했다. 아무리 애써도 변이 나오지 않은 아이는 된장을 퍼서 슬그머니 집어넣거나 개똥을 넣어오기도 했다는 기사도 있다. 한국기생충박멸협회의 실태 조사에 의하면 1974년 전 국민의 84퍼센트가 기생충에 감염되었다가(동아일보 1974년 4월 3일) 그 후 점점 줄어들었다. 기생충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으면 1976년 9월 3일 한국기생충박멸협회 서울시 지부는 시민 기생충 관리사업의 일환으로 ‘기생충 홍보관’까지 개관했겠는가?
지금 채변 봉투가 사라진 데는 한국기생충박멸협회의 대국민 캠페인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최근 13세 소년의 몸에서 나온 3.5미터 길이의 촌충 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름도 어려운 ‘광절열두조충’이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으려면 아무래도 지난 1970년대에 초등학생들이 <이순신 장군의 노래>를 개사해 불렀던 <산토닌>이라는 회충약 노래라도 다시 불러야 할 듯싶다.
“이 뱃속 침노하는 회충의 무리를~ 산토닌 앞세우고 무찌르시어~ 이 뱃속 구원하신 산토닌 장군. 우리도 산토닌을 애용합시다~♬”
글·김병희(한국PR학회 회장·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2014.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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