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부터 저기 저 먼 남도까지 발길을 두어 본다. 살던 곳에서 멀리 떠나가면 일상에서도 좀 더 멀리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대 때문이다. 삶이 질주하는 경주마 같아도 숨을 고를 여유는 필요하다. 더구나 올해는 청마의 해가 아니던가. 청마의 푸른 기운을 배낭 안에 눌러 담고 무채색의 겨울 풍경과 퇴색했던 삶의 옷에 쪽빛 같은 푸른 기운을 입혀주고 싶어진다.
전남과 경남 아우르는 S트레인에 몸을 싣다
그런 설렘으로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 스스로 남도를 훑는 S트레인을 탄다. 열차는 레일 위에도, 오늘 여행의 궤적에도 선선히 S자를 그리며 달린다.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아우르는 경전선을 모태로 S트레인은 태어났다. 누구는 동서 화합의 열차라고도 하고 누구는 갯내 나는 남도의 고단한 인생살이를 대변하는 열차라고도 하지만, 여행자에게는 그저 경상도와 전라도를 두루 돌아볼 수 있는 행운의 열차다. 열차가 지나는 경전선의 기차 노선은 자연스럽게 지도 위에 S자를 긋는다. 그래서 S트레인이다.
South(남쪽)의 S나 Sea(바다)의 S와도 일맥상통한다.
자동차보다 앞서 달렸던 열차는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며 주춤했던 시간을 견디고 다시 진화하고 있다. 무작정 빠른 것만을 좇다가 이제는 빠른 것과 느린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승객의 취향을 배려한다. 열차에도 어느 새인가 느림의 미학이 스며들었다.
바다열차니 와인열차니 O트레인이니 V트레인 같은 코레일의 관광열차에는 기차만이 갖는 독특한 여행이 있다. 특정한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는 목적성 없이도 여행은 완성될 수 있다.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그와 함께 흘러가는 마음의 변주를 지켜보며 기차의 아날로그적 정서를 즐길 수 있으니까.
한번 지나쳐버리고 나면 다시 찾을 수 없는 인생의 시간들처럼 S트레인도 하루에 딱 한 번만 왕복한다. 아침에 출발지에서 떠난 열차는 도착지에 멈추어 짧게는 2시간에서 길게는 5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그러면서 열 개 남짓한 조용한 역들에 잠시 잠시 멈추어 선다. 여행자는 어떤 역에서라도 내릴 수 있고 저녁이 되면 다시 돌아오는 열차에 몸을 실을 수 있다. 내리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열차는 잠깐이나마 인적 드문 역에까지 일일이 멈추어 주는 아량을 가졌다. 기차에 탄 사람도 그런 아량을 가져야 이 기차를 즐길 수 있다.
아삭하고 새콤달콤한 참다래 풍성한 겨울 벌교
벌교역 앞 벌교시장. 서대전에서 출발해 순천을 거쳐 광주 송정까지 가는 S트레인을 타고 가다가 내린 곳은 벌교역이다. 벌교역 앞이 바로 벌교시장이다. 벌교장은 4·9일 5일장으로 장날에는 지붕을 덮은 시장 주변으로 무시로 난전이 펼쳐진다. 꼭 장날이 아니라도 시장은 그런대로 좌판을 펼치지만 그래도 인근 시골의 촌부들까지 봇짐 지고 나오는 장날보다 못한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벌교역을 나서니 꼬막보다 먼저 반기는 것이 다래다.
벌교 특산물인 참다래. 우리에겐 키위로 더 친숙한 과일이다. 뉴질랜드 같은 외국 과일인 줄로만 알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 벌교에서도 생산되는 특산품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사람도 있을 테다.
지금이 딱히 제철이라고 할 수도 없는 참다래가 그물망에 뭉텅이로 담겨 시장 주변 길가 여기저기에 줄을 지어 쌓여 있다. 다른 과일처럼 가을에 수확하는 참다래지만 냉장만 하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해서 이렇게 한겨울을 넘겨 봄까지 판매한단다. 4킬로그램들이가 2만원이다.
참다래는 수확하자마자 냉장 보관된 것이라 아직 채 익지도 않은 상태다. 집에 두었다가 조금씩 익혀가며 먹으라는 상인의 말이 따라붙는다. 마트에서 기껏해야 대여섯 개에 3천~5천원을 주고 사먹던 귀한 녀석을 저렴한 가격에, 그것도 국산으로 한아름이나 얻게 되니 시장 보는 맛이 새록새록하다. 가게에서 바로 택배로 부쳐주니 여행 중이라도 걱정할 건 없다. 오랜 기간 보관이 가능해 쉬이 물러질 염려도 없고 냉장 보관하면 봄까지 두고 두고 먹을 수 있다. 택배 부치기 전에 몇 개쯤 빼내어 배낭에 넣고 여행 중 간식으로 먹을 요량이다.
사실 벌교에 온 것은 무엇보다 이 겨울이 가버리기 전에 쫄깃쫄깃한 속살이 매력인 꼬막을 먹고 싶어서다. 벌교에서 난 신선한 꼬막 한 접시를 먹으면 남도에 온 보람마저 느낄 것 같다. 그래야 얼마 남지 않은 이 계절에도 아쉬움이 남지 않을 테다. 산지의 제철 음식을 먹는 것은 여행자의 특권이다. 꼬막은 11월~이듬해 4월까지가 제철이다. 매년 11월에는 벌교에서 ‘꼬막축제’도 열린다.
벌교역 앞 벌교시장 입구에 할머니들의 꼬막 좌판이 섰다. 갯벌의 진흙이 아직 그대로 묻어 있는 가무잡잡한 참꼬막과 하얀 세꼬막, 그 옆으로 참꼬막의 몇 배나 되는 피꼬막도 다소곳이 담겨있다. 참꼬막은 세꼬막보다 훨씬 고급으로 친다. 맛도 엄연히 다르다. 조개의 돌기가 더 두드러지고 거칠며 단단한 참꼬막은 톱니바퀴 같은 입을 앙다물고 있다. 조개 치고 꽤 비싼 가격을 당당히 붙이고 있는 데다 그마저도 없어 못 파는 지경이니 늘상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래도 벌교까지 왔다면 참꼬막을 안 먹고 갈 수 없다.
탱글탱글한 참꼬막은 세꼬막 가격의 2~3배를 쉬이 넘는다.
둘은 겉모습에서 풍기는 포스도 다르지만 속살의 ‘때깔’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참꼬막은 ‘뻐얼건’ 피를 가득 품고 있다. 삶을 때 그 육즙을 잘 간직하도록 하는 것이 참꼬막을 맛있게 먹는 비결이다.
좌판에서 흔히 참꼬막의 갯흙을 씻어내지 않고 파는 것은 참꼬막의 육즙과 신선도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참꼬막에 갯흙은 공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갯흙이 씻겨져 버리면 참꼬막은 금방 말라버린다. 참꼬막 한 소쿠리의 가격을 묻는 서울아가씨에게 할머니는 대뜸 “이거 아무나 못 삶아. 그냥 식당 가서 사 먹어. 잘못 삶으면 맛을 다 배린당께” 하신다. 그러면서도 순순히 꼬막 삶는 법을 알려주신다.
할머니가 알려준 방법이란 이렇다. 꼬막은 소금 넣고 민물에 2시간 이상 해감하고 나서 박박 문질러 씻는다. 물이 팔팔 끓으면 차가운 물 한 컵을 부어 식혀주고 바로 꼬막을 넣는다. 한 방향으로 저어주면서 2~3분이 지나면 꼬막이 한두 개 입을 연다. 그때 바로 꺼내야지 꼬막 입이 다 벌어져 버리면 육즙이 빠져나가고 질겨져서 맛이 없게 된다.
벌교역과 시장 주변 곳곳에 꼬막정식 식당
불에 몇 초만 더 있어도 알맹이가 쪼그라들면서 입을 바로 벌려버리기 때문에 꼬막을 데칠 때는 불 앞에서 떠날 새가 없다. 삶은 꼬막에는 바로 찬물을 끼얹어 준다. 찬물을 끼얹는 것은 껍질에 남아 있는 열로 꼬막이 더 익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다루기 어렵고 예민한 녀석들이다.
벌교역과 시장 주위로는 꼬막정식을 파는 식당들이 많다. 꼬막정식은 삶은 꼬막·꼬막무침·양념꼬막·꼬막된장국·꼬막전 등 5가지가 어느 식당이나 비슷하게 기본으로 나오고 가격도 1만5천원 선으로 맞춰져 있다. 식당에 따라서는 여기에 꼬막탕수 등이 더해지면서 가격이 약간씩 달라지기도 한다. 2인 기준으로 주문할 수 있는데 역시 산지여서 그런지 꼬막을 원없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푸짐하게 나온다. 꼬막정식에는 참꼬막과 세꼬막이 음식 종류에 따라 적당히 섞여 나오는데 대개 삶은 꼬막은 참꼬막으로, 꼬막무침 등은 세꼬막으로 나온다.
맛 기행은 무언가 대단히 특별한 것을 먹어서 즐거운 건 아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몇 마디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그곳’에서 흔한 먹을거리를 맛보며 ‘그곳’의 정서를 느껴보는 시간들이 팍팍한 삶에 잔잔한 즐거움일 뿐이다. 벌교역까지의 기차여행, 역 앞에 펼쳐진 벌교시장 구경, 점심으로 꼬막정식, 후식으로 벌교 참다래까지…. 벌교 여행이 꼬막 속처럼 알차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4.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