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는 광주, 동쪽으로는 부산까지 내달리는 남도해양열차 S트레인은 순천역에서 30분가량을 쉬며 전열을 가다듬는다. 순천에서 쉬어 가는 기차를 따라 여행자도 종종 순천에 발을 딛는다. 남도 교통의 요지로 손꼽히는 순천에는 먹거리, 살거리, 구경거리가 넘친다. 순천역에서 10분만 걸어가면 닿는 순천 아랫장에서 잠시 배낭을 부려볼까.
3월의 장터는 요란한 봄맞이
순천 아랫장에 들어서니 장(場)이 먼저 봄 향기를 전한다. 장이 전하는 봄은 눈에 보이는 사방의 풍경에 앞선다. 우선 냉이, 쑥, 달래, 취 같은 봄나물들이 지천으로 난전에 누워 초록의 전령을 자처하고 나섰다. 불현듯 콧속으로 들이치는 향긋한 봄냄새는 초록에 따라오는 귀하디 귀한 덤이다.
장이 도로변까지 점령했다. 별 볼 일 없이 지나는 행인이라도 불편하기보다는 구경하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겨울의 혹독함을 내몰고 드디어 나른하게 봄을 맞은 장터의 요란스러움에 겨우내 잠자고 있던 생의 에너지가 예고 없이 솟구친다.
순천에는 아랫장과 웃장이 있다. 아랫장은 2, 7일에 서는 5일장으로 순천에서 가장 큰 장이다. 순천뿐 아니라 고흥과 광양, 여수 등 인근 지역에서도 장을 보러 올 만큼 아랫장은 크고 다채롭다. 남도 4대 장이자 전국적으로도 알아주는 풍성한 장이다.
순천 아랫장 안에는 싱싱생생한 물건들로 넘친다. 아랫장은 인근 지역의 유통 집결지라고 할 만큼 물건이나 사람이 많다. 순천은 예부터 호남 교통의 요지였다. 2~3년 전만 해도 고흥이나 여수에서 순천을 지나지 않고는 광주나 서울 같은 대도시로 나갈 수도 없었다. 지금도 남도 구석구석으로 가는 경전선 기차는 순천역에서 갈아타야 하는 일이 잦다. 남도해양열차 S트레인도 순천에서 한참을 쉬어간다.
그에 비해 5, 10일에 서는 웃장은 아랫장보다는 더 오래 됐지만 아랫장에 비해 규모가 작다. 16개의 국밥집이 모여 있는 국밥거리가 특성화되어 있는 것이 큰 특징인데 국밥거리는 굳이 장날이 아니라도 상시로 문을 연다. 국밥거리는 현지인에게도 인기지만 특히 여행자들에게는 순천의 성지처럼 알려져 있어 순천에 오면 누구나 웃장에 들러 국밥 한 그릇씩 하고 간다. 100년의 역사를 가진 웃장이지만 1974년경에 도시 확장으로 생긴 아랫장에 비해 시장 자체의 기능은 많이 쇠퇴한 상태다.
순천 아랫장에는 다른 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분명히 있다. 연신 등에 멘 북을 발로 쳐대며 노래 부르는 게 일인 동동구루무 아저씨는 여느 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옛날 장터의 모습을 재현한다. ‘둥둥~둥둥~’ 북 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시장을 울리면 아저씨의 작은 기계에선 반주가 튀어나온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야~”
유행하는 대중가요가 동동구루무 아저씨의 쇼로 이어지면 너나 할 것 없이 장 보다 말고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제친다. 시장 한가운데에서 목청껏 따라 부르는 노래 맛이 입에 착착 감긴다.
입에 착착 감기는 건 유행하는 노래뿐만은 아니다. 길에서 마시는 한 사발 막걸리도 입에 붙는다. 아랫장에는 한 잔에 천 원하는 막걸리를 구루마에 끌고 다니며 막걸리를 커피처럼 파는 막걸리 노점이 있다. 흥에 겨운 막걸리 아저씨에게는 말만 잘해도 맛배기 술 한잔은 그냥 얻어 마신다.
팥죽 시키면 ‘팥칼국수’… 팥죽은 ‘동지죽’
막걸리 하면 시장 한 쪽에 파는 명태전 천막식당도 빠질 수 없다.
이름하야 ‘명태대가리전’은 아랫장에선 장보다 흔히 먹는 주전부리다. 보통 명태 살로만 하는 생선전과 달리 명태의 대가리로 전을 부친다. 생선 맛도 맛이지만 명태 대가리 살 발라먹는 재미가 제법이다. 값도 싸다. 생선 대가리라지만 명태살 솔찬히 붙은 명태대가리전 한 장이 3천원이다.
명태전 천막 옆 2,500원짜리 짜장면 한 그릇도 아랫장 명물이다. 짜장면은 2,500원, 짬뽕은 3,500원이다. 이 짜장집을 지날 때 먹는 사람 모습을 슬쩍 훔쳐봤다면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힘들다. 남 먹는 모습을 보거나 냄새를 맡고 나면 기어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짜장면과 라면이라지. 어김없이 짜장과 짬뽕의 선택의 순간에서 갈등이 인다.
다른 시장에도 흔한 단팥죽이나 족발은 명함을 내밀기도 못내 쑥스러울 정도로 순천장의 물산은 풍부하다. 그럼에도 아랫장에서 나름 유명세를 떨치는 흔하고 또 귀한 먹을거리가 바로 단팥죽과 돼지족발로 만든 돈족탕이다. 팥죽집과 족발집이 시장 귀퉁이 한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시골장터의 단골 메뉴인 팥죽과 돼지족발을 사골국물처럼 뽀얗게 끓여 먹는 돈족탕은 요즘이야 아무 때고 먹을 수 있는 값싼 음식이지만 이런 음식들이야말로 장날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서민의 보양식이다.
순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부부팥죽집에서는 리필이 당연하다. 반쯤 그릇을 비운 손님에게 다가와 “더 드릴까” 묻는 정스러운 친절. 주인 부부는 돈을 얹어 받지 않고도 손님이 원하는 만큼 팥죽을 내어준다. 맛이 좋아서인지 인심이 좋아서인지 장날에는 대여섯 개의 테이블이 쉬이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단, 팥죽을 시키면 으레 팥칼국수가 나오니 새알심이 들어 있는 팥죽을 먹고 싶다면 동지죽을 시켜야 한다는 점은 알아두자.
아랫장은 그야말로 난전의 천국이다. 잡화로 시작해 어물전을 거쳐 과일과 나물전을 지나며 농산물로 마무리되는 아랫장. 육·해·공이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남도 각 가정의 풍요로운 밥상과 남도 식당들의 인심은 이 풍성한 장터에서 나오리라.
해 뜨면서 시작해 뉘엿뉘엿 해가 지고 비로소 마지막 남은 좌판까지 자리를 접고 일어서며 끝이 나는 5일장. 5일장의 매력은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시장 안에는 사람이 있고 사람이 가꾸고, 기르고, 잡고, 만든, 농수산물과 시대를 초월하는 각종 잡화가 있다. 그것들은 그대로 박물관이 되고 미술관이 된다. 그러니 “장 보러 간다”는 말은 곧 “인생박물관에 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장’이다.
막걸리 한잔에 삶의 에너지를 채우고
시장은 정류장이다. 무시로 ‘정이 흐르는 장’이라는 뜻의 정류장(情流場)이다. 재래시장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파는 장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방앗간 인근에 쌀 빻고 고추 빻는 할머니들의 머리를 꼬불꼬불하게 말아줄 미용실이 몰려 있는 것처럼, 할매 할배의 장날 필수 코스인 병원도 몰려 있다. 그뿐이랴. 웃장 인근에는 점집도 국밥집만큼이나 많다. 여인숙과 선술집도 장 주변에 즐비하다.
오늘도 나는 시장에 ‘놀러’ 간다. 코를 킁킁거리고 여기저기로 눈알을 굴리고 이것저것 참견도 해 가면서 잃었던 삶의 호기심을 채운다. 살 게 없었는데 살 게 생기고, 살 게 있었어도 ‘고마 이자뿌고’ 한잔 술에 놀아버리는 일도 흔한 장터에서 잃어버렸던 삶의 에너지를 채운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4.03.24